톨킨/글

[아에안드] 호수

Rhindon 2018. 8. 29. 17:14

모종의 에유... 친구한테 스팀펑크랑 마녀물 합치면 무지 재미있다고 주장하다가 여기까지 왔음... 옛날에 읽었던 소설 중에 호수 괴물이 주인공 엄마인 척 꾸미고 주인공을 마녀로 모는 그런 거 있었는데 제목 생각나면 한 번 더 읽고 싶다ㅎ



 기차는 역에 멈춰 그들을 떨궈냈다. 키큰 소나무 하나 외따로 선 추수 지난 벌판이었다. 철로 끄트머리가 가리키는 곳에는 꼭대기 깎인 언덕이 솟아 있었고 형제는 남쪽 대도시를 떠올렸다. 하릴없는 생각이었다. 아에그노르는 형에게 거친 상앗빛으로 웃었다. 둘은 짐가방을 끌며 맨흙 드러난 길을 걸었다. 첫눈이 내렸다. 그들에게나 첫눈이지 이 땅은 올 겨울 이미 몇 번 눈을 맞았으리라. 앙그로드가 눈송이를 잡으려는 시늉을 했다.


 언덕 발치로 다가갈수록 띄엄띄엄 벌판에 혹처럼 돋아 있는 집들 사이 간격이 줄었다. 오래된 목책이 시내를 감싸고 있었다. 길은 곧았고 오르막은 가팔랐다. 문지기 하나 없는 외문을 지나 둘은 목조 건물 사이 울퉁불퉁하게 포장된 도로를 걸었다. 온통 갈색으로 차려입은 꼬마 아이 하나가 골목길 언저리에서 그들을 빤히 보다 말고 사라졌다. 앙그로드는 외투 목깃에 댄 흰 모피를 만지작거렸다가 스스로 무안했던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뼈와 가죽 뿐인 회색 고양이 하나가 담벼락에 앉아 입을 쩍 벌렸다.

 "살풍경하네요."

 저가 말해놓고서도 아에그노르는 사람의 음성이 빈 시가지에 울리는 것에 놀랐으나, 앙그로드는 단조롭게 대답했다.

 "개척자 마을 같지는 않구나."

 영주관이 저기겠지, 하면서 앙그로드가 턱짓한 건물은 그나마 튼튼해 뵈는 이층집이었다. 건물을 둘러싼 쇠울타리에 아에그노르는 빈정이 상해 중얼거렸다.

 "어디 저기는 과연 문지기가 있나 봅시다."

 "그렇게 단정짓기는 너무 이르지 않느냐?"

 앙그로드는 앞장서 남은 거리를 올라갔다. 울타리에 이르렀을 무렵 아에그노르는 숨이 차 헐떡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시내를 내려다보듯 지어진 영주관조차 기껏해야 언덕 중턱에 있을 뿐이었다. 아에그노르는 언덕 꼭대기와 뒤편의 소나무숲을 기억하고는, 이걸 언덕이라고 불러도 되나 고민했다. 큰형님은 분명 언덕이라고 하셨었는데.

 문득 태엽 감는 소리가 들렸다. 곧장 눈을 든 아에그노르는 철책 위, 회전축 위에 앉은 자동인형을 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회전축 주위로 쇠울타리 일부가 빙 돌아 수레 하나 지날 만한 길을 냈다. 역시나 앞장서 걸어들어가며 앙그로드가 허공에 던지듯 말했다.

 "아까도 있었다."

 아에그노르는 귀를 붉혔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앙그로드는 영주의 오른편에 앉았고, 아에그노르의 자리는 그 옆이었다. 영주 왼쪽, 영주의 아내와 앙그로드가 대화를 주도하는 사이 아에그노르는 식탁을 차근차근 둘러보며 영주 일가를 눈에 익혔다. 장년에 이른 엉주와 그 아내, 아들 한 명에 딸 둘, 그리고 아들 쪽 아내와 딸 둘이었으니 나름 대가족이었다. 아에그노르는 제 가족을 떠올리려다 말았다. 옆에 앉은 막내딸이 낮은 소리로 물어 왔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세요?"

 아에그노르는 포크 밑 짓이겨진 감자를 보고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배가 고프지 않군요...... 베릴."

 소녀가 생긋 웃었다. 그녀 건너편에 앉은 그녀의 언니는 공상에 빠진 듯 식사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얼굴은 숱 많은 갈색 머리카락에 푹 가려 있었고 더군다나 식당은 꽤 어두웠다. 아에그노르는 술잔을 손 안에서 굴리며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 눈을 맞춰볼까. 베릴은 그에게 말을 몇 번 더 붙였으나 곧 흥미를 잃었는지 곁의 조카에게 돌아섰다.

 "브레길, 오늘은 뭘 했니?"

 아이가 묻기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와락 재잘거렸다.

 "숲에, 호수에 갔어요! 히르웬이랑요. 뭐 맨날 그게 그거잖아요. 인어도 마녀도 못 봤어요. 오늘은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특히 마녀 말예요. 아까워라."

 "호수요?"

 앙그로드가 물었다.

 "아이 둘이 다니기는 위험하지 않습니까?"

 아에그노르가 덧붙였다. 안드레스가 고개를 들었다.

 "마을 아이들과 같이 다니니까요."

 "언덕 위 숲에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소문은 무성한데 밝혀진 건 없죠. 궁금하시다면 내일 한 번 가 보시겠습니까?"

 브레고르가 제안하자 앙그로드는 덥석 그러자고 승낙했다. 아에그노르는 생각해 보겠다며 답을 미루고는 마녀라고요, 브레길을 보며 말했다. 브레길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호숫가에 반쯤 부서진 집이 하나 있는데 아무도 들어가본 적이 없다더라, 그런데 거기 마녀가 산다더라, 그 마녀는 태엽고양이를 갖고 있는데 그 울음을 들으면 신기한 꿈을 꾸게 된다더라, 인어와 이야기한다더라.

 괘종시계가 열 시를 알리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보로미르는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아에그노르는 아내의 회색 머리에 입맞추는 영주를 보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날 밤, 아에그노르는 등잔을 찾아 들고 손님방을 나섰다. 더듬더듬 뒷문에 다다르자 바랐던 대로 철책 위로 인형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그러면 그렇지. 저 밑 외문까지 돌아서 다녀야 했다면 아이들은 아마 들판에서 놀았을 것이었다. 자동인형은 다행히 문을 열어 주었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목책을 마주한 아에그노르는 손쉽게 개구멍을 찾아냈다. 어른이 지나갈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그는 등잔 고리를 입에 물고 크게 세 발짝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그만큼 더 뒷걸음질 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달려가 도약했다.

 손끝으로 목책 상단을 붙잡고서 몇 번 버둥댄 끝에 아에그노르는 한쪽 다리를 넘겼다. 그리고 목책 반대편을 보고 질겁했다. 웬 가시덤불이야? 그는 다른 다리도 끌어당기고서 목책을 세게 걷어차며 뛰어내렸다. 마른 잎 위로 데굴데굴 굴렀지만 한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그는 용케 쏟아지지 않은 등잔을 다시 손에 들고 나서 돌아갈 때는 들판 쪽으로 들어가야지, 다짐했다. 이제 호수를 찾을 차례였다. 히르웬 말대로라면, 수로를 따라가야 할 텐데.

 등잔을 높이 치켜들어 봐도 어둠은 그닥 걷히지 않았다. 아에그노르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무작정 숲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밤중에라도 길을 잃을 만한 숲은 아니지 싶었다. 그만큼 그는 벌써 이 특이한 마을을 믿고 있던 것이었다.

 그가 기어이 호수를 찾은 것은 돌이켜 보건대 새벽 세 시 언저리였다. 호반에 서자 한 순간, 숲을 지워내고 하늘을 똑같이 베껴넣은 듯한 풍경이 펼쳐졌었다. 잉크를 푼 듯 새까만 물에 별이 떠올랐다. 호숫가에 빽빽히 늘어선 소나무들은 달빛을 받아 검푸른 뭉텅이로 흔들렸다. 아에그노르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저 밑 기슭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림자를 좇았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치맛자락이 사그락거렸다. 여인은 망설임없이 물가 굽은 나무를 타고 올랐다. 물 위로 드리워진 가지에 걸터앉아 그녀는 장화 신은 발을 탁 찼다. 수면이 일렁였다. 여인은 작게, 온 숲이 울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결이 잦아들자 아에그노르는 물에 비친 인영의 머리카락에 별이 엮인 것을 보았다.


 아침, 아에그노르는 식당으로 가는 길에 안드레스와 마주쳤다. 그녀는 밤 산책은 즐거우셨냐 비밀스런 미소를 건넸고 아에그노르는, 언제 한 번 그 부서진 집도 구경시켜 달라 답했다. 히르웬이 까르륵 웃으며 그들을 지나쳐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