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골페아] 엑카이아
일단 써보긴 했는데... 이 둘은 아직도 잘 모르겠...
티리온이 칼라키랴 끄트머리에 서 있다는 것은 곧, 마음만 먹으면 펠로리 산자락을 타고 올라 민돈 엘달리에바와 눈높이를 같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었다. 적어도 한 때는. 적어도 한 때는, 칼라키랴로 쏟아져 나온 빛이 외로운 섬에 닿아 산맥 동쪽 최초의 꽃들을 깨워냈더랬다. 태양의 배가 펠로리를 아득히 뛰어넘는 지금에 와서도 핀골핀은 종종 투나 언덕을 덮은 금모래가 생기를 잃은 데, 티리온이 더는 검푸른 파도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데 흠칫 놀라고는 했다.
펠로리는 요정은커녕 오로메의 사냥개들도 오르지 못할 만큼 매끄럽게 깎인 채였고 그 너머에도 넘쳐흐를 만한 빛은 없었다. 핀골핀은 허리를 숙여 다이아몬드 조각을 집어들고 손 안에서 굴려 보았다. 그러고는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로칼로르에 훌쩍 뛰어올랐다.
어렸을 적에도, 머리가 굵어진 후에도 티리온에서 알쿠알론데까지는 곧잘 말 달려 가고는 했었다. 길은 옛모습 그대로였다. 바람이 옷자락을 펄럭이는 것이 상쾌했다. 이전에는, 투나에 잠시 방문했던 피나르핀이 다시 항구로 돌아갈 때면 그와 아나이레는 종종 배웅하러 동행했다 너무 멀리나가버리고는 곤혹스러워 했었다. 하기야 정오를 맞은 아만에서 별다른 위험이 있었으랴마는.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똑같은 길 위를 그와 동생의 아이들이 날듯 달렸었고, 이내 왕래가 잦아들었지. 침울한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로칼로르가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아,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이 길을 지났던 무렵을 그는 잊지 못했고, 그러니 흐린 햇살마저 라우렐린보다는 어둠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이누르는 시간을 요정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대해, 만웨의 새매가 그를 찾은 것은 정해진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었다. 반사적으로 뱉은 불평이 그래도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제아무리 로칼로르라지만 말발굽의 반동과 눈가를 스쳐 지나가는 풍경 사이에는 묘한 불일치가 있었다. 핀골핀은 어지러움에 마른침을 삼키며 더 빨리, 하고 속삭였다. 로칼로르는 목덜미를 들썩였다. 칼라키랴로 이어지듯 내륙을 향해 길게 뻗은 만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고삐를 움켜잡았다. 길이 백사장을 만나 흩어지고 금가루가 희뿌연 보석에 섞여들자 로칼로르는 돌연 조충처럼 방향을 꺾었다. 백철 발굽에 모래알이 퍽 튕겼다.
북쪽, 더 북쪽으로 가야 할 테다.
그는 하루 밤낮을 꼬박 달리고서 말을 세웠다. 로칼로르는 기운이 남아도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아니었다. 렘바스를 베어물며 핀골핀은 로칼로르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둘 중 하나라도 신이 나 보이니 다행이었다.
가지 않으면 그만인 일. 그러나, 동생이 종용한 대로, 그에게는 놀도르 전체에 대한 책임이 있었을 뿐 아니라, 행운이 따른다면 이 골치아픈 상황을 어찌어찌 해결할 능력도 있었다. 페아노르가 그의 예상처럼만 움직여 준다면. 나름 믿는 구석은 존재했다. 만도스의 전당이 지난 행적을 돌아보고 뉘우치는 곳이라고는 하나, 발라르에 대한 적개심을 빼놓는대도 페아노르에게는 드넓은 세상에 대한 갈망이 잔존할 것이었다...... 그가 옳았다면.
아라만은 변함없었다. 핀골핀은 로칼로르를 쓰다듬어 주며 북풍을 맞았다. 삶을 되찾고서 이곳에 온 적은 없었으나, 그는 삶과 죽음 가운데 어딘가를 헤매다 이 돌투성이 해안에 다다랐었다 - 다시 만들어진 육체는 헬카락세의 냉기 어린 바람으로 빚어졌던 것이었다. 그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보석 조각을 문질렀다. 페아노르가 돌아오리라던 시간은 반나절 남짓 남아 있었다.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핀골핀은 머릿속을 스치는 기분나쁜 예감을 털어내려 성큼 한 걸음 딛었다. 바윗돌이 드문 곳을 따라 홀린 듯 내려가니 밀려온 파도에 장화 코를 적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직 멀리 동쪽 땅을 떠도는 태양은 물결에 은박을 씌워냈으나, 저쪽 해안은 당연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멀리, 일출같은 붉은기가 어리는 환상에 그는 온 정신을 앗겼다.
핀웨-놀로핀웨라, 코웃음을 치며 태연히 막사 안으로 들어서는 이는 다름아닌 페아노르였다. 막사라기도 어려웠던 게, 티리온에서 급히 꾸려온 사냥용 천막은 아라만의 혹독한 추위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페아노르는 이곳이 제 작업실인 듯 자연스럽게 들어와 그의 침상 끄트머리에 앉았고, 둘 사이 거리는 서로가 손을 뻗으면 손가락을 엮을 수도 있을 만큼 훅 줄어들었다. 핀골핀은 몸을 바로 세웠다.
"잠자는 이를 깨우는 취미를 가지셨던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자고 있었더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쿠알론데를 떠난, 혹은 피나르핀이 떠난 이래 그는 제대로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페아노르는 비식비식 웃으며 말했다.
"돌아가고 싶다면 가거라. 붙잡지 않으마."
웬일로, 하는 생각이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이복형은 덧붙였다. 위대하신 아라타르가 너를 다시 받아준다면야 말이지만, 맹세한 것도 없으니 저들에게 싹싹 빌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느냐. 핀골핀은 미간을 좁혔다. 페아노르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조용히 타오르는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얇은 담요가 형편없이 헝클어지게 말아쥔 손아귀는 누구의 감각을 그리는 것인지, 문득 못견디게 궁금했다.
"하지만 저도 맹세를 했습니다."
페아노르는 탁 그를 바라보았다. 어두워야 할 막사 안을 밝히는 것은 그의 무릎에 놓인 푸른 등불이었고, 그 빛은 일그러진 입가에 자색 그림자를 씌웠다. 울 듯한 표정은 지독히 낯선 것이었으나 핀골핀은 이를 못 본 체했다. 페아노르는 벌떡 일어서 중얼거렸다. 잘, 자거라. 그리고 그의 이복형은 쫓기듯 도로 나가버렸었다.
해가 어느새 그 앞쪽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서야 그는 퍼뜩 돌아서 로칼로르를 불렀다. 예가 아니다, 서두르자. 푸릉 갈기를 던지며 로칼로르가 발굽을 굴렀다. 그가 올라타기 무섭게 말은 달려나갔다. 그는 잊고 있었다. 페아노르는 그와 본바탕부터가 다른 이였다.
외해의 어두운 물결 너머로 밤의 문이 열리며 아리엔이 사라질 때, 그는 휘황한 빛을 등진 페아노르를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