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마에] Blind
다 쓰기 귀찮음
1.
첫 방문을 기억했다. 신다르 변경수비대가 말한 대로 동쪽길과 힘링 사이에는 소나무 숲이 자라 있었고, 그는 웃비가 막 걷히는 참에 숲을 벗어나 힘링 언덕 위 거대한 요새를 보았다. 침울한 하늘 아래, 사촌의 성채는 지반이 찌그러지지나 않을까 싶은 중압감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왠지모를 안도가 찾아들었다. 길을 따라 언덕을 조금 돌아나가자 석벽에 얼룩처럼 수문이 드러났고, 그는 방위를 가늠해 보다가, 저게 작은 겔리온이겠구나 하고 넘겨짚었다.그는 기수에게 깃발을 꺼내들 것을 명하고는 망토 두건을 걷었다. 비는 그쳤으되 잿빛 구름은 여전히 상공을 뒤덮은 채였다.
영주가 자리를 비웠다는 전언에 그는 말을 마구간지기에게 넘기고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두터운 성벽 안은 예상했던 것보다 아늑했고 늦가을 찬바람은 곳곳에 피어오르는 장작불에 가로막혔다.
2.
눈먼 사랑은 미친 짓이야!
누군가 난데없이 그렇게 외치자 핀곤은 조심스럽게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외친 이의 목소리는 꽤 큰 편이었던 데다 내용이 내용이었기에 그 주위로 잠시 적막이 내려 앉았지만, 이내 다시 왁자지껄한 소음이 솟아올랐다. 핀곤은 잠시 머뭇거렸다. 연회는 막바지에 다다라 주빈석이 빈 지는 오래였고, 아직까지 회장에 남은 건 잔뜩 취한 치들 아니면 질서를 지켜야 할 장교들 뿐이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경계는 모호했으며 핀곤으로 말하자면 그는 차라리 전자이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 연인에게 청혼했다가 대차게 거절당했다나."
"그걸 어떻게 알아?"
마에드로스는 눈을 굴렸다. 내가 모르는 게 어딨어. 거기 대고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핀곤은 대답을 피했다. 술주정을 상대해 주기에는 그 자신도 딱히 정신이 말짱하지는 않았다.
원래라면 경비병이 서 있어야 했을 곳이었다. 그러나 경비병이 누구였든, 그는 아마 진탕 퍼마시고 황홀경을 떠돌고 있을 터였고, 벽감은 대신 그 주군과 그의 친구가 차지했다. 마에드로스는 주먹만한, 밑이 둥근 작은 잔을 손 안에서 굴리다가 이따금 홀짝였다. 술보다는 분위기에 취한 모양이라고, 대수롭잖게 판단한 핀곤은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그는 언제부턴가 마에드로스가 만취한 것은 고사하고 그 흔한 두통 한 번에 시달리는 것조차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티를 내지 않는 건지, 정말 그런 건지, 원.
3.
눈먼 사랑은 미친 짓이야!
마에드로스는 그 벙사를 목소리보다는 거기 담긴 절절함으로 알아보았다. 상대 쪽이 보수적이었던지, 전시라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거절당했던 이였다. 요즘 들어 성급한 청혼이 많았고 그것은 어쩌면 동부변경 전체를 뒤덮은 불안정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가 통제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으며, 그리 생각한다는 것부터가 실은 그가 그날 유독 풀어졌다는 반증이었다. 그는 잠시 병사 주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가 그만두었다.
"정말 그럴까?"
핀곤이 문득 물었다. 취기가 올랐는지 끝이 뭉개진 발음이었다. 빛깔 옅은 눈동자가 지나치게 밝았다. 마에드로스는 슬쩍 눈길을 돌리며 되물었다.
"정말 그렇다니, 뭐가?"
"그냥, 다? 눈먼 사랑은 미친 짓일까? 눈먼 사랑이 정말 있을까? 저 자는 정말 그렇게 사랑했을까?"
그러고서 핀곤은 머쓱하게 덧붙였다. 네가 모르는 게 뭘까?
"네가 내게 묻지 않을 만한 것을 찾기가 더 쉽겠는걸. 음......"
그는 말을 골랐다. 핀곤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표정은 얼핏 엄숙하기까지 했다. 벽감 바깥 떠들썩한 잡음은 언젠가부터 그닥 거슬리지 않았다. 연회장 높이 매달린 등불은 따스한 빛을 쏟아냈고 서투르게 춤추는 병사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용케 거의 취하지 않은 기사 하나가 부하들의 강요에 못이기는 척 잔을 비우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먼지투성이 군화를 신은 채 탁자에 올라가 발을 굴렀다. 사랑이 미친 짓이라던, 실연당한 병사는 어느 틈에 노랫가락에 머리를 끄덕였다. 맴돌던 의문은 밀려났다. 그러니까,
"눈을 감지 않고서 사랑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어."
4.
그렇게 말하는 마에드로스의 눈꺼풀은 천천히 감기고 있었고, 그가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자 핀곤은 자연히 그를 따라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에드로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고, 벽감 안은 어두컴컴했고, 연회장은 점차 더 시끄러워지기만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잠든 듯한 사촌을 한참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