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킨/글

[글로엑셀] Fete

Rhindon 2019. 1. 18. 20:19

저번에 쓴 거 좀 이어보고 싶어서



 초여름 도시는 흰빛에 젖어 있고, 하짓날 시답잖은 업무를 맡길 만큼 그들의 왕은 잔인하지 않아, 샘물의 영주는 날이 완연히 새기가 무섭게 제 집을 나섰다. 몇 안 되는 층계를 밟아 거리에 닿으니 지나는 문간마다 연한 빛깔 화환이 내걸려 있어 그는 저 혼자, 햇살에 바랜 것인가, 당치 않은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일러야 전날 저녁에 엮인 꽃들일 터였다. 그러나 그는 괜한 마음에 제 소매를 손끝 사이로 잡았다가, 창가의 누군가 눈길 주었을세라, 다시 턱을 쳐들고 발길을 옮겼다. 아직은 아침 바람이 찼다.

 도시에 꼬박꼬박 문을 잠그는 이는 없었으나 아예 걸쇠마저 마련하지 않는 이는 드물었다. 그는 반 뼘쯤 열린 문을 마저 밀고 빈 복도에 발을 들였다. 드디어, 어쩌면 마침내, 진중한 초록빛이 시야를 메워, 은백색 예장의 요정은 싱긋 웃고야 마는 것이었다. 저가 그랬듯, 집주인 역시 오늘만은 시중드는 이들을 죄 물렸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소리죽여 긴 복도를 밟아나가, 한 번에 두 단씩 계단을 올라, 철의 관문을 여는 양 가만가만 침실 문을 안으로 밀었다.

 한껏 젖힌 휘장 사이로 쨍한 일광이 내리쬐는 가운데, 새하얀 침대보 위에는 금발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문간에 기대 엷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다가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글로르핀델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잔뜩 구겨진 여름 이불을 아이처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웅크린 어깨가 숨소리에 맞추어 깊게 오르내렸고, 등에 달라붙은 셔츠로 뼈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글로르핀델을 흔들어 깨우려다 말고 머뭇거렸다. 셔츠의 흰 천이 흠뻑 젖어 있었다.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투명한 별빛을 굳히고 검날을 축성하는 손길로, 그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모았다. 무릎을 접어 올리며 붙어 앉자 침대 틀이 조용히 끼익거렸다. 결 고운 머리카락은 손가락으로 몇 번 빗어내리는 것으로도 쉽게 정돈되었고, 뺨 밑의 몇 가닥을 살며시 빼낼 때마저 글로르핀델은 뒤척이지 않았다. 언뜻 손끝에 스치는 맨살이 땀과 체온에 뜨끈했다.

 허리춤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그가 거의 다 땋아내리고서야 글로르핀델은 무언가 웅얼거렸다. 그는 땋은머리에서 한 손을 떼어 친구의 날개뼈 가운데 가만히 얹었다. 조금 더 명확한 발음이 들려왔다. 아이카스텔.

 강인한 결의, 또는 혹독한 희망. 어느 틈엔가 글로르핀델은 돌아누워 그의 손을 마주잡았고, 한없이 어린, 물같은 얼굴은 우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황금꽃의 영주는 나직이 속삭였다.

 "꿈을 꾸었어."

 너를 죽였어, 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무슨 꿈을 꾸었던지, 글로르핀델은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고, 답을 독촉하는 대신 엑셀리온은 창턱에 기대 서 그가 잠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기다렸다. 글로르핀델은 옷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가, 생각을 고친 듯 바닥에 구겨져 떨어진 겉옷에 대충 팔을 꿰었다. 엑셀리온은 쯧, 혀를 찼다.

 "그러다 또 허둥대지."

 "의식은 정오니까, 잠부터 깨고 생각해 보련다. 뭐라도 마실래? 집에 먹을 건 없는데."

 그러며 그들은 동시에, 온갖 보고며 명단이 난잡하게 흩어진 탁자 한 구석에 위태롭게 놓인 접시와 먹다 남은 빵 조각을 보았고, 엑셀리온은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글로르핀델은 태연히 장화 끈을 묶으며 말했다.

 "이 앞 광장에서 꿀빵을 파는데......."

 "그리고 오늘은 장사 쉬겠지? 알 만하다. 보자, 위병소에 들르면 뭐라도 있을 텐데."

 친구는 역겹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고,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한 번 거른다고 죽기야 하겠어, 하는 말에 글로르핀델이 활짝 얼굴을 폈다. 도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린 그가 조급하게 제 옆을 탁탁 두드리길래, 엑셀리온은 못이기는 척 다시 그 곁에 앉아 침대 가 너머로 다리를 늘어뜨렸다. 친구의 땋은머리는 벌써부터 서서히 헝클어지고 있었다.

 "머리 좀 푼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니고."

 글로르핀델이 자연스레 투덜댔고, 엑셀리온은 별 말 없이 제 생각을 싼 벽을 조금 더 내렸다. 심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나라도, 아무리 투루카노라도, 그건 아니지. 잠옷 바람으로 추방당할 일 있어?"

 "글쎄, 그대가 그리도 차려입는 것을 귀찮아 하니까 말이야."

 글로르핀델은 양손을 머리 밑으로 베고는 다시 킬킬거렸다. 내가 추방당했다 돌아오면, 들여보내 줄 건가? 그는 아랫입술을 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 성품에 울모같은 후견인은 어림도 없지만, 어지간한 마이아라면 또 모르지.

 "발라라우코Valarauko라도 잡아와야 하나,"

 하며 글로르핀델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라우코Rauko를 잡아오면 마이아로 쳐 주지, 어때?"

 확 찡그린 표정 너머로 엑셀리온은 로그의 거대한 몸집과, 그에 못지 않은 망치의 연상을 읽어냈고, 게으르게 실소했다. 먹구름낀 하늘이 눈 깜짝할 사이 개듯 가벼이, 글로르핀델은 그를 따라 웃더니, 한 팔을 뻗었다. 그가 잠시 뜻을 몰라 망설이자 글로르핀델은 천장을 힐끗 쳐다보고는 아예 윗몸을 일으켜 덥석 그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라우레핀딜?"

 갑작스런 움직임에 예복이 요란하게 부스럭댔다. 글로르핀델은 빳빳한 천에 입김을 뱉으며 속삭였다. 명치에서 조금 빗겨난 곳에 대고,

 "그래, 내가 잡아올 테니까."

 이, 의미는,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엑셀리온은 잠자코 친구의 등을 쓸어내릴 뿐 아무 위안도 건네지 않았다. 이 꿈 아닌 악몽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

요즘 거의 곤돌린밖에 손 안 대는 것 같은데 뽕이 안 빠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