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에전에 쓴 건데 아까워서... 그냥 여기다 올려둠
하필이면 라벤더였다.
만약,을 따지는 것은 늘 소용없는 일이었으나 그럼에도 아우리는 고심했다. 그가 가져온 것이 참나무 잎사귀였다면, 제철을 맞은 포도 송이였다면, 흰 달빛에 적신 조약돌이었다면. 그랬다면 그녀는 그의 이마에 산새마냥 가벼이 입을 맞추고는 툭 튀어올라 노랫가락을 졸라냈을 터였다. 그리고 버터 한 덩이에 검은 빵을 내밀면서 자랑스레 웃었겠지. 찬상자 안에 든, 단검을 잔뜩 품은 버터는 물론 아니었다. 그녀는 그 버터를 근처 농장에서 얻었었고 (버터가 있던 자리에는 샹들리에에서 떨어진 금빛 초받침을 놓아두었더랬다) 그 속 알싸한 지난 봄의 풀냄새에 기뻐했었는데. 하지만 크오스가 무심하게도 가져온 것은 말린 라벤더 한 다발이었고, 뭐 그러니 일은 어쩔 수 없게 되어버린 셈이었다.
아우리는 ‘암여우’의 푸른 불빛에 기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내렸다. 암여우를 지상에 이렇게까지 가까이 데려오는 일은 드물었고, 불안한 건지 암여우는 희미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아우리는 웃으며 암여우가 자리한 유리병 겉면을 쓰다듬었다. 유리병 옆의 라벤더 다발은 불만스러워 하고 있었지만 라벤더에게 신경써 주고 싶은 마음은 도통 들지 않았다. 아우리는 부스스한 머리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까지 손가락으로 거듭 훑어내리다 빗과 머리기름을 꺼냈다. 빗은 아직 제가 암소 턱뼈이던 시절을 기억하는 채였음에도 기꺼이 그녀를 도와주겠노라 약속했지만, 문제는 기름이었다. 오렌지 향은 빠질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 같았고, 라벤더가 들어갈 자리는 아무리 기름병을 이리저리 기울여봐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기름병 뚜껑을 열고 옆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만드래그 교수가 항상 말하던 대로, 연금술의 구 할은 화학이었고, 화학의 구 할은 기다리는 것이었으니까. 크오스가 한 달 전쯤 건네준 치마가 죄 먼지투성이가 될 게 뻔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먼지는 쉽게 털어낼 수 있었다.
팔림세스트(palimpsest).
차갑게 식은 돌바닥에 누워 그녀는 기지개를 켰다. 팔림세스트, 거듭 쓴 양피지의 검은 얼룩이 깃펜 대를 따라 빨려 올라가고, 바람에 날려 흩어졌던 잉크 가루가 양피지에 스며들었다가 이내 벗겨져 빨려가고, 다시 한 번, 또 한 번 칼에 긁혀 지워졌던 글들이 나타났다 곧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코끝을 간질이던 오렌지향이 완연히 수그러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아우리는 라벤더를 손가락으로 잘게 부숴 기름병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털실뭉치같은 머리카락이 언젠가 그랬듯 백금처럼 반짝일 때까지 빗어내렸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하늘색 리본으로 묶고서 그녀는 벌떡 일어서 한 바퀴 빙 돌았다. 치맛자락에서 떨어져나간 먼지가 그녀 주위로 원을 그렸다. 그녀는 폴짝 뛰어, 암여우와 빗과 머릿기름은 남겨두고 나무문 틈새를 빠져나갔다. 이 통로에서 왼쪽으로 꺾고, 저 층계를 박차오르고. 어느새 그녀는 ‘것들의 꼭대기’에 서 있었고 대학 건물의 붉은 기와가 발밑에서 미끄러웠다.
저 멀리 엘로딘이 보였고, 아우리는 그를 향해 맨발로 걸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스승님.”
*
컴퓨터를 켰으니 주얼의 게임 올리겠습니다...
'타 장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빅앙] 그 꿈 속에 살아요 (0) | 2018.08.2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