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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9.01.18 :: [글로엑셀] Fete
  7. 2019.01.16 :: [길켈] 부친상
  8. 2019.01.09 :: [곤돌린] 190109
  9. 2019.01.05 :: [곤돌린] Midsummer's day
  10. 2018.12.18 :: [핀마에] F.A. 63
톨킨/글 2019. 5. 20. 16:37

H님이랑 썰 풀다 생각난 거

 

"네가, 어떻게 네가!"

쿠루핀이 짓씹듯 뱉어낸 단어들은 마디마디 동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핀로드는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내가 뭘 말야, 쿠루핀웨?"

"순진한 척하지 말라고, '폐하'. 그 회색망토 버러지가 한 요구가 무슨 의미인지 뻔히 알면서!"

”엿듣고 있었나? 아무리 너라 해도, 좀 유치한데.”

빛나다 못해 희게 번쩍이는 두 눈을 핀로드는 가만히 응시했다. 두 나무의 빛이 몇백 년을 뛰어넘어 그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나, 그 또한 칼라퀜디, 서녘의 높은요정이었다. 쿠루핀의 신경질에 겁먹을 리 만무했다. 그를 알아챈 듯 쿠루핀은 곧 제 분노를 거두어들였다. 그는 흡사 애걸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핀다라토, 엘웨는 그 보석이 누구 것인 줄 알면서도 네 인간에게 그 따위 임무를 준 거야. 한 번에 딸의 구혼자도 처리하고 우리도 모욕하려는 거라고."

"우리?"

핀로드는 낮게 물었고 쿠루핀은 잠시 침묵했다. 핀로드는 시선을 손끝으로 떨구었다. 바라히르도, 오랜 옛날 베오르도, 그 모든 아이들도 이제 썩고 없는데, 그럼에도 요정의 육신은 끈질기기 쇠같아, 가문의 반지가 끼워져 있던 손가락에는 둥근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우리란 건 뭘 뜻하는 거지? 나르고스론드? 놀도르? 페아노르 가문? 아니면 단지 너희 형제들 뿐인가? 그도 아니라면 너와 티엘코르모 뿐인지도 모르겠군. 텔페린콰르는 네 주머니 속에 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페아노르를 가장 닮은 아들이 할 말을 잃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냉랭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핀로드는 작게 미소했다. 아쉽게도 쿠루핀은 곧 말문을 되찾았다.

"당연히 우리 모두를 말하는 거지. 우린 친족 아닌가? 핀다라토, 네가 그 망할 인간을 돕는다면 나는 너와도 싸워야 해.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로스가르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나?"

한 순간 쿠루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의 말마따나 그들은 친족이었으니, 날선 대화 내내 그들은 정신의 가장자리를 맞대고 있었으나 쿠루핀은 이제 그마저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핀로드는, 글쎄. 불탈 때는 아무렇지 않던 쿠루핀의 눈은, 차게 식어내려서는 되려 소름끼쳤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러면 복수인가?"

쿠루핀이 시리도록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핀로드는 한 손을 뒤로 뻗어, 태피스트리 사이로 드러난 돌벽을 쓸었다. 그의 왕국. 왕좌 앞 치솟는 분수부터 발치의 모래알까지, 어느 것 하나 그의 힘이 서리지 않은 것은 없었다. 나르고스론드가 곧 그의 보석이었고, 그는 마땅히 상속을 두려워했다.

"쿠루핀웨 아타린케, 잘 들어. 난 이 회랑을 지나 내 백성 앞에 설 것이고 내 뜻을 밝힐 게다. 날 방해하려거든 마음대로 해. 허나 내 장담하는데, 페아나로의 아들, 넌 나를 죽이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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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hi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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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글 2019. 5. 20. 16:28

로한! 외치고서 에오윈은 크게 웃었다. 로한, 리더마크, 에오를! 밀밭같은 금빛 머리카락이 세찬 바람에 휘날렸다. 폭넓은 치맛자락은 굳게 선 양 다리를 감고 돌았다. 초원이 파도치는 바다처럼 일렁였다. 세오드윈의 딸은 진흙 빛깔 외투를 벗어던졌다.

"이 땅이 어찌나 그리웠던지! 오라버니, 맙소사, 메두셀드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겨울바람이 태피스트리를 어지럽히고 늦은 밤 기사의 귓가에 속삭이나요? 새 시대의 새벽에 단 하나 변하지 않길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에오메르는 너털웃음으로 답했다. 에오윈, 에오윈, 내 누이! 여울을 건너자마자 푸르게 펼쳐진 초원에 에오윈은 온 넋을 빼앗겼고, 어깨 너머로 곤도르의 젊은 섭정은 피곤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에오윈은 햇살을 닮은 환한 얼굴로 연인을 돌아보았다.

"파라미르! 전쟁과 죽음 외의 이유로 이 땅에 발딛는 건 처음 아닌가요? 보세요, 까마귀 떼는 걷혔고 장례는 끝나, 들판은 다시 빛나는걸요!"

"그리하여 이제 말과 기수는 어디 있습니까? 날리던 밝은 머리카락은?"

고서를 읽는 말투로 왼 파라미르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제가 던진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는 에오메르에게 손을 내밀었고, 에오메르는 망설임없이 그와 팔뚝을 맞잡았다.

"마크의 왕, 건강하신 것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나보다 기쁠 리가요!"

그리고 그제야 에오메르는, 그들이 거의 처음부터 로히릭으로 대화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슬쩍 제 연인 옆에 붙어 선 에오윈이 파라미르와 팔짱을 끼며 그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에오메르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에오윈의 신다린은 끔찍할 텐데요."

"오라버니보단 나아!"

파라미르는 난처한 체 양손을 들어보였다.

"에오윈보다도 끔찍하시다면야......."

에오윈은 배신에 치를 떠는 눈빛을 보내다 말고 에오메르의 품에 덥석 안겨들었다. 오빠, 나 이혼할래! 답지않은 어린 말에 에오메르는 누이의 머리를 쓱쓱 헝클었다.

"그래, 전쟁쯤은 불사해야겠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쯤은 해줄 수 있지."

"엘렛사르께서 아시면 전 죽은 목숨이겠는걸요."

파라미르는 체념한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에오윈은 에오메르의 품 안에서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아, 내 사랑, 내가 당신한테 그럴 리 없잖아요!"

 

 

*

엘보론 가졌을 때쯤 로한 놀러온 에오파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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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hi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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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글 2019. 2. 19. 22:24

사람이 시간이 없으니까 생각나는 것만 쓰게 된다 다고르 다고라스 글로엑셀... 에휴 에오파라 빨리 끝내야지

얘네 참 해석 안 변한다 진짜




 검

 같다고

 생각했었다.


 놀랄 일인가? 아니, 그는 그리 여기지 않았다. 어렴풋이, 왕족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상대가 핀웨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핀웨 놀도란은 완전한 놀도였으나, 미리엘도, 인디스도 그런 전형적인 놀도르의 미감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그리고 왕족의 아름다움은 말하자면, 힘과, '노래'에서의 '위치'와, '결말'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다시 정의하자면, 혈통에서 비롯된 것.

 상대는 오롯이 빛났다.

 그것은 역시 왕족과는 다른 빛인지라 투르곤과 아레델이, 이드릴이 빛을 담은 그릇 그 자체로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할 때, 상대는 늘 가림막의 인상을 주고는 했다. 가림막이 있기에 그 너머의 빛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찬란한 빛은 언제나 상대의 테두리를 흩고, 정작 그의 육체의, 반듯한 이마와 먹구름 같은 회색 눈의, 답지 않게 마르고 강인한 손목의, 믿기 힘든 허약함을

 지워버리고는

 했다.

 그래, 상대에게 역시 '이야기'가 주어졌으리란 것을 그는 의심치 않았다. 그 자신이 크릿사이그림의 바위를 꿈꾸듯.

 그러나 그는

 상대가 왕의 분수에 손을 담그고 나직이 성대를 떨며 노래할 때면 차라리 제 손으로 그 목을 쥐어 조르고 싶어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눈길을 돌리고 말았으며 그 은백색 예복의 가없이 어리고 결코 젊지 않은 요정 군주의 무방비한 등에 긴 칼을 꽂아넣으려는 욕망에 쥐어진 주먹의 손등 위로 돋는 핏줄을 바라보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검 같다고 생각했었다. 잘 벼려져 새파란 빛을 뿌리는 한 자루 검과 같은 사내. 검의 아름다움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흠잡을 데 없는 중심과 위태로우리만치 바짝 선 날, 겹겹이 축복의 말이 얹힌 균형추.

 그에게 주어진 것이 수정 방패와 은빛 무구 뿐인 사실은 차라리 당연했다. 냉엄한 희망.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라 결코 하나의 절망에 무릎 꿇지 않을, 언젠가 들려올 나팔 소리를 기다리며 산산이 부서지는 심장의 고동만은 간직할, 그들의 검. 그의 이름은 전투의 함성이 되리라.

 마땅한 일이었다.


 "……언행불일치잖아."

 닥쳐.

 상대는 한숨을 흘렸다. 절그럭, 하고 수갑이 손목뼈에 부딪쳤다. 마음만 먹으면 음 하나로도 끊을 수 있을 수갑을 상대가 놓아두는 것은, 묶이지 않은 다리로 자동차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지 않는 것은, 아직 신뢰가 다하지 않은 까닭일 테다.

"라우레핀딜. 이러지 마."

 그리고 그 사랑스런 목소리에서 권능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마저도, 상대가 제 사람에게는 끔찍히 약해, 차마 의지를 강제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그는 어찌 들으면 실소일 수도 있을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닥치라고. 재갈을 물려버리기 전에.

 "라우로. 제발. 난 돌아가야 해."

 가서 죽으려고?

 그 질문을 소리내어 말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상대는 어쨌든 알아들은 모양이었지만. 찌그러진 승용차의 조수석에 앉아, 깍지낀 두 손을 머리받이 뒤로 넘기며 기지개를 켜는, 일곱 시대를 넘어 지상에 돌아온 놀도르의 가인은 조용히 대답했다.

 "염병하네."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상대는 대꾸 없이 긴 다리를 턱턱 접어 대시보드에 올려놓았다. 먼지낀 검은 가죽장화에 마찬가지로 검은 청바지. 적갈색 후드. 낮을 대로 낮은 채도만 제외하면 오랜 옛날과는 양 극단을 달리는 차림이었다. 뒷목을 덮을락 말락 하게 잘라버린 흑발은, 상대의 말에 따르면, 애도의 상징이었다. 글쎄. 그의 생각에 주인 잃은 긴 땋은머리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분노하고 있잖아, 너.

 "언제부터 날 그리 잘 알았다고."

 으음. 화났어?

 "기억상실증이야? 방금 뭐라 했는지도 잊었나?"

 예법에 어찌나 철저하던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신병들에게는 그 화신으로마저 여겨지던 샘물의 영주는, 몰락 날 고스모그를 앞두고 오르크라도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소리를 지껄였다고 했다. 적어도 그는 그리 들었었다. 분명, 네 아비가 거미 새끼에게 다릴 벌려 널 낳았다지,는 시작에 불과했었는데. 사람과 거미와 사람의 형체를 취한 아이누의 생태에 대한 더 많은 것을 강제로 알게 되지 못한 채 검과 채찍이 맞닿은 것이 차라리 다행일 정도로.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에게 검이 있다고 항상 검을 뽑아 휘두르고 다니지 않는 것처럼, 언어도 다스려야만 하는 게야, 글로르핀델. 섣부른 말은 상처를 주지. 그러나 이제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비꼬고 비틀어 가시를 세워냈다.

 이야기가 와전되는 데는 삼천 년이면 충분하여, 갓 완공된 임라드리스에서 그가 들었던 설화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불러주던 자장가를 입에 올리고 고스모그에 맞선 고결한 요정. 작은 아이야, 두려워 말거라. 폭우는 몰아치고 천둥은 지척을 울리나, 두려워 마라, 내가 여기 있으니.

 저 말이 정말이냐 묻는 엘론드의 어린 아들들에게 그는 그저 웃어 주었었다.

 "이봐, 라우로. 이제 와서 날 무시하겠다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그럼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나 말해 봐. 돌아가는 길은 알아?"

 돌아가서 뭐하게?

 상대는 넘긴 손으로 의자 머리받이를 감싸 안았다. 영혼에까지 자취를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 지독한 화상은 애초에 그 피부에 닿지도 않았던 것마냥 사라졌으나, 살을 에는 얼음이 남긴 잔금 같은 흉은 여전히, 마디 뚜렷한 열 손가락의 끄트머리에 인장처럼 박혀 있었으니. 헬카락세에는 상대의 핏방울이 남아 있을까? 역겨운 생각이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씹었다.

 "돌아가야지. 의무니까."

 또 그걸 죽이려고?

 "그래. 아마 성공할 거야. 지금까지는 어김없이 수레바퀴가 돌았으니까."

 다시 가라앉은 어조였다. 결국 그런 식이었다. 한없는 눈물이 뿌려지고, 상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그댄 내게 죄지을 수 없어, 였었다. 일곱 번째 배를 두고 상대가 투르곤에게 비명을 질러 가며 뻗대었을 때, 무작정 후려친 손의 끝에 있던 것이 바로 이 음성이었다. 이미 물을 들이쉰 자의 둔탁하고 지친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찢고 망각에서 가장 먼 곳에 자리잡았었다.

 항상 우리에게 유리하지는 않았었지.

 "대개 우리에게 불리했었지. 뭐가 그리 새로운데?"

 바다.

 "흠."

 바다. 우린 바다로 갈 거야. 그 잘난 물의 영주께 보여 드려야지 않겠어. 신의 총애가 의미하는 게 무언지.

 "이미 충분히 보셨을걸."

 차체가 덜컹거렸다. 아스팔트라도 깔린 도로는 점점 사라지고, 봄 햇살에 언 강이 녹듯 흙길이 헤드라이트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밤이었다. 그의 모든 감각은 지금, 오후 네 시의 태양이 있을 자리에 상현달이 떠 있어야 한다 성마른 소리를 내질렀다. 달은 없었다. 태양은 기억을 간직하지 않았다.


 오늘, 전장에서 네 이름을 불렀노라고, 꾹꾹 눌러쓰고서, 그는 기어이 솟아오르는 흐느낌에 몸을 들썩였었다. 오늘 네 이름을 불렀어, 엑셀리온. 네 이름이 어느새 승리의 상징이 되어 있어서, 그 어린 것들에게, 나는 도저히 우리 싸움을 설명할 수 없어서, 오늘 네 이름을 불렀어.


 "울어?"

 그는 오른손을 운전대에서 떼어 눈시울을 벅벅 문질렀다. 그가 감정을 숨기는 인물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상대 앞에서라면 그는 늘 곱절은 거리낌을 잃었다.

 "참나. 제멋대로 하고 있으면서 울기는."

 매정하네.

 "울어라, 그래. 실컷 울어."

 네가 할 말이야?

 "뭐 어때. 날 보고 신의 총애니, 뭐니 하기에는 그대도 잘한 건 없어."

 확실히 상대는 달라져 있었다. 자루 없는 검처럼, 도저히 다룰 길 없는 이 무기를, 그럼에도 들어 적에게 겨누기로 한 자는 누구인가. 날을 움켜잡아 피 흘릴 자는 누구인가. 그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상대는 여전히 대시보드에 다리를 올린 채였다. 앞유리창에 왼발을 대고 오른발로 뒤축을 밟아 장화를 벗었다. 회색 양말 신은 발가락으로 라디오 버튼을 멋대로 누르다가, 잡음에 이내 한숨을 쉬며 다리를 도로 모았다. 장화 한 짝이 차 바닥으로 툭 하고 내려 앉았다. 그들이 라디오 전파가 잡히지 않을 만큼 문명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잡힐 전파가 없을 만큼 문명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에 가까웠다. 급히 고른 차는 이륜 구동이라, 길이 험해질수록 엔진은 요동을 쳤다.

 "불 켜면 안 되지?"

 안 되지, 그럼. 안 보여.

 헤드라이트가 껌벅였다. 차라리 불을 켜는 편이 나을 법도 했다. 그 얼굴, 네 얼굴을 한 번만 더 보면 안 될까. 안 되지, 그럼.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에 그는 그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눈꺼풀 안쪽에 그려낼 수 있을 만치 잘 아는 이목구비라도, 그 뒤의 영혼은 한낱 상상이 담을 수 없는 것인지라, 사실, 명백히 다른 자아를 일루바타르의 자식은 끝까지 이해할 수 없게끔 되어 있는지라, 그는 상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화들짝 놀라고는 했었다. 처음 몇 년 간은.

 그 다음 몇 백 년 간은.

 "생각을 좀 해 봐라. 한 번 죽는 거랑, 한 시대를 사는 것. 우리 중 누가 더 신들에게 아등바등 매달린 거냐?"

 너도 한 시대를 살았지.

 "그대도 한 번 죽었고. 그리 치면 그댄 두 시대를 산 셈인데."

 곤돌린을 증오했으면서.

 "운명을 증오할 수 있어?"

 장화 위에 떡하니 걸친 발이 발가락을 꿈지럭거렸다. 그는 짜증을 억누르며 눈길을 찢어 길 앞쪽을 바라보았다. 길 양쪽으로, 용케 아직까지 멀쩡한 울타리 너머로, 이 지방 특유의 너른 초원이 펼쳐졌다. 아르드갈렌, 혹은 안파우글리스. 용이 온다면, 아르드갈렌을 닮은 이 들판이 재로 부서지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뭐, 그야 위대하신 분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에아렌딜? 투오르?"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그 인간을 구하려던 거였어?

 만약 상대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뭐라 생각해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몰락 날 투오르가 간신히 메고 온 축 늘어진 몸을 기억했다. 희게, 회색으로 질린 얼굴에 담긴 감정을 도저히 읽지 못했던 것을 기억했다. 모두가 공포에 사로잡혀 지레 뒷걸음질칠 때, 홀로 앞으로 나서던, 제 피와 적의 피를 뒤집어쓴 상대를 기억했다. 그 의문은 끝내 그의 차례가 돌아와, 그가 산맥을 차고 뛰어오르는 순간까지,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네가 그렇게 죽는 것보다, 사는 게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냉철하던 네가 고작 이 생각을 안 해 봤을까.

 "비밀 하나 알려줄까?"

 그래.

 "넌 항상 떠오르는 걸 그대로 말해 버리지. 사내의 손에 죽지 않으리라 따위의 예지를……."

 데른헬름, 데른헬름! 그러나 미나스 티리스의 흰 성벽 위에서, 젊은 섭정의 손을 잡고 선 것은 치유자 에오윈이었다. 그 시대에 필요한 것은 전사가 아니었으니까. 세오드레드의 누이는 펠렌노르에서 죽었다. 시대를 넘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이야기, 노래 뿐이었다.

 "나는 아니었어."

 아니야, 가 아니었다. 아니었어. 아니. 부정의 과거형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을 터였다.

 "설령 그것이 아이누르의, 또는 에루의 의지라 해도, 적어도, 최소한의 이유만큼은 알기를 바랐거든. 이해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때, 그 분수 앞에서,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 저건 내가 죽여야겠다."

 으음.

 "나는, 라우레핀딜, 맹세컨대 그 순간만큼 살아 있었던 적이 없어."

 운명에 매여서?

 "그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

 그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타이어가 괴성을 질렀다. 어째서? 그들은 바다에 있었다. 검은 모래가 사방으로 흘렀다. 조수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달이 사라지니, 눈으로 보아 알게 된 것들. 태양 역시 밀물이며 썰물 따위를 만들 수 있었다. 말라죽은 갯벌은 그리 생각 않겠지만. 텔페리온의 꽃과 라우렐린의 열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는 애써 무시했다. 그는 망할 신학자가 아니라고!

 그러나, 태양은, 지고 있었고, 그 뒤로 거대한 목구멍을 드러낸 것은, 분명,

 "밤의 문이로군."

 뭐가 그렇게 태연한데!

 "알고 있었잖아. 떠나면서부터."

 알고 있었다. 단지,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오감과 오감 이상의 감각에 예지와 직관과 엉터리 희망을 불어넣는 그 무언가가 알고 있던

 예정된 절망.

 "예정된 종말이지."

 밤……이었는데.

 "세상이 늘 이러니까. 한 겹 뿐인 어둠을 밤이라 여길 때, 진정한 밤이 찾아오는 거야."

 뭐가 그렇게 태연한데.

 황혼의 햇살이 빗겨 비친 손이 운전대 위로 그의 손을 겹쳐 쥐었다. 손목의 수갑이 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른 한 손이 그의 턱을 잡고 얼굴을 돌렸다.

 "나를 봐, 라우레핀딜."

 "얼굴 보는 거, 이게 마지막일 텐데."

 그는 가속기를 내리밟았다. 운전대를 거칠게 꺾었다. 상대는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양손을 뗐다. 그제야 제 자리에 똑바로 앉아, 안전벨트를 당겨 매는 육체는, 한 순간 마지막 햇빛 속에 지나치게 날카로운 가장자리처럼 희미해졌다가

 이내

 그림자로 가라앉았다.


 아, 얼굴, 못 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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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글 2019. 2. 1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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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천천히 잊히는 것이라고 했다.

 "투람바르!"

 니니엘은 크게 외치고 웃었다. 햇살같은 맑은 얼굴을 잔뜩 찡그려 가며, 무엇이 그렇게나 유쾌한지,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에게 마주 미소를 지어주며 투린은, 아니, 투람바르는 목탄을 내려놓았다. 브레실에서는 질좋은 종이는커녕 피지 한 장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자작나무 껍질은 꽤 괜찮은 대용품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슨 대단한 예술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럭저럭 흰 배경에 윤곽만 잡힌 집의 비뚠 기둥이 그를 방증했다.

 "투람바르, 그렇게 앉아만 있다가는 땅에 뿌리를 내릴 거예요. 봐요,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갠 하늘이었다. 발목 언저리에 돋은 짧은 풀은 정오 아래 싱그럽게 빛났고, 작은 공터는 니니엘의 존재만으로 꽉 차올랐다. 나무둥치에 기대 앉은 투람바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때로 그의 연인은 한없이 천진했다.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니니엘, 내 사랑."

 그러자 니니엘은, 그렇게 우아하지만은 않은 콧방귀를 뀌고서, 다시 까르르 웃으며 달려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는 화악 볼을 붉혔다. 입맞춘 자리가 식상하게도 데인 듯 뜨거웠다. 빙그르르 돌아서는 니니엘의 몸짓에는 이미 춤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잊히는 것이라고 했다.

 누가 그리 말했었는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아, 또다른 누군가가 말했을 듯, 모든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며 기억이 예외일 리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는, 가을 밀밭 같고 막 엉기는 버터 같은 머리카락의 사랑스런 여인을 보며 피나르핀 가의 찬란한 금발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녀 발치에 핀 봄꽃을 보며 붉은 세레곤을 떠올리지 않았다. 인간답게 묵직한 걸음을 보며 첫눈 위를 흔적 하나 없이 달리던 사냥꾼을 떠올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드루아단 석상의 코끝을 어루만지는 키큰 소녀를 보았고, 만족했다.

 그리고 무엇을 떠올리지 않을지마저 잊었다.

 (왜냐하면 도르로민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잊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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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글 2019. 1. 25. 20:32

썰 풀었던 투린 랄라이스 투오르 니에노르가 같이 컸다면 if... 너무 보고 싶어서...



 "우르웬!"

 다급한 외침이 방 안에 울리기 무섭게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나동그라진 수틀이 저만치 굴러가다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잘못 가눈 바늘에 가운뎃손가락에 피가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상처를 살필 새도 없이, 허겁지겁 방으로 달려든 형제의 어깨를 붙잡고 간신히 눈을 맞추었다. 검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빠! 오라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우르웬..."

 그 이름이 불릴 때는 반드시, 큼직한 사고가 터지고야 만 후였다. 그것도, 그들 남매에게 어지간한 불운은 익숙하다 못해 친근한 것이었으니, 정말이지 감당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형제의 뺨을 감싸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오라버니, 제발, 랄라이스를 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리고, 거친 숨을 가까스로 다스린 투린은, 핏기 없는 입술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모르웬의 딸,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미처 두려워했던 것보다 나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제아무리 고집불통에 귀머거리인 투린이라도 누이를 버리고 달아날 수는 없었던 탓이었고, 그리하여 싱골은 양아들의 변론에 귀를 기울였고, 여느 때처럼 멜리안의 무릎에 앉은 히슬룸의 인간 소녀를 보았다. 딤바르에서 한 해하고 하루를 보내라는 싱골의 판결이 떨어지고 투린이 울컥해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의 곁에는 침착한 미소를 띤 센활 벨레그가 있었다. ('싱골이 명하지 않는다고 메네그로스에 머물 자네는 아니잖나,' 하며 벨레그는 투린의 손목을 꽉 잡았었다. '허울뿐인 재판에 괜한 의미를 더하진 말게나.')

 투린이 형을 끝내고 메네그로스로 돌아온 날, 그들은 나란히 싱골과 멜리안 앞에 나아가 허리를 숙였다. 도리아스는 결코 고향이 될 수 없었다. 잿빛 도르로민에 그들의 친족이, 갓 얼굴이나 보고 떠나왔던 어린 동생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왕에게 이별을 고했고, 랄라이스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생을 생각했다. 싱골은 별다른 맹세를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다시 한 번 도리아스에 발을 들이고자 할 때, 멜리안의 장막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노라 경고했을 뿐이었다. 투린은 그녀의 눈에만 띄도록 설핏 웃었다. 어머니의 늙은 하인들 손에 이끌려 처음 장막을 헤맸을 때 난데없이 들려왔던 사냥개들의 울음소리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고, 랄라이스는 그의 우정을 믿었다.

 싱골은 투린에게 금고를 열어주었고 투린은 검은 날을 가진 칼을 골라 들었다. 앙글라켈. 도르로민의 용투구 역시 고이 싸여 안장 주머니에 넣였다. 멜리안은 그들의 어깨에 요정의 망토를 둘러주고는, 랄라이스의 손에는 니프레딜 인장이 찍힌 꾸러미를 건넸다. 랄라이스는 마이아 여인에게 마지막으로 활짝 웃어보였다.


 모르웬의 저택은 텅 비어 있었다. 투린은 아무런 말 없이, 오래 전 후린의 것이었을 방을 찾아들었다. 그는 마루 밑에 숨겨진 요정의 검을 그녀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검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면서도 검집을 허리띠에 매었다. 그러나 벽에 기대 놓인 작은 하프를 그녀는 제가 먼저 집어들었다. 도리아스의 궁정에서 그녀가 배웠던 것과는 천지차이였지만, 어쨌든, 한때 후린의 손이 닿았을 물건이었다.

 투오르와 니에노르는 이제 열두 살쯤 되었을 터였다. 살아 있다면. 투린이 브롯다를 베어 죽이는 사이 그녀는 서둘러 아이린을 다그쳤다. 로르간, 로르간. 두건을 눌러 쓰고 회색 벌판으로 숨어들며, 투린은 그 이름을 짓씹듯 중얼거렸다. 등뒤로 브롯다의 집에 불길이 일었다. 한 무리의 도망자들이 그들의 발치를 쫓았다.


 "당신은 누구요?"

 깡마른 소년이, 아마 제 동생일 법한 사내아이를 꽉 끌어안으며 묻자 랄라이스는 잠시 망설였다. 두 아이들은 그녀와 투린과는 달리 샛노란 금발이었고, 어쩌면 그들의 친족일지 몰랐다. 투린은 앙글라켈을 망토 끝자락에 슥 닦고는 그녀 곁에 와 섰다. 로르간의 시체는 저만치 널부러져 있었다. 전투는 막 끝난 참이었으나, 그들의 일행, 아니, 부하들까지 이끌고 자리를 벗어나려면 한 시라도 빨리 동생들을 찾아내야 했다.

 "그녀는 모르웬 엘레드웬과 후린의 딸 우르웬이다. 너는 누구지?"

 투린은 한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쥐었다. 몇몇 사내들이 지친 기색으로 그들 주위로 다가왔다. 갓 풀려난 노예들 중 제 발로 서 있는 이들은 눈앞의 아이들 뿐이었다. 그녀는 투린의 손을 마주 눌러잡고 말을 이었다.

 "대답하라. 나의 오라비 투린은 북부의 대장 후린 살리온의 아들이며 도르로민과 라드로스의 정당한 후계자이다. 그대 군주의 물음에 답하라!"

 아이들보다는 둘러선 어른들을 겨냥한 선언이었다. 낯선 문장이 입안을 할퀴고 지나갔다. 하지만 자리한 이들의 얼굴에 언뜻 자부심이 스치는 것에 그녀는 만족했고, 놀랍게도, 그 말에 제 형 뒤에 숨어 있던 아이가 앞으로 나서 고개를 세웠다. 새된 외침이 터져나왔다.

 "이리하여 마침내 뵙는군요, 투린, 랄라이스! 나를 기억지 못하십니까? 나는 후린의 딸, 눈물의 딸 니에노르요!"

 아, 여자아이였다. 그제야 랄라이스는 오래 전 아버지의 푸른 눈이 똑바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것을 알아챘다. 투린이 풀썩 무릎을 꿇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가 어색하게, 마디 불거진 손으로 투린의 등을 토닥였다. 투린은 거의 흐느낌같은 소리를 내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눈시울이 뜨거워, 랄라이스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세게 문지르며 시선을 돌렸다. 다른 아이 하나가 토끼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투린이 니에노르를 안아들고 일어서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투린의 발치에 몸을 낮추었다.

 "후린의 아들."

 그 한 마디에 담긴 경외는 투린마저 잠시 아이에게 눈길을 주게 하기 충분했다. 아이는 허리춤을 뒤적여, 이 빠진 짧은 칼을 뽑아 눈높이로 올려 들었다. 투린이 입을 조금 벌렸다.

 "나는...... 나는 후오르의 아들 투오르입니다. 사촌형제, 당신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칼은 넣어두거라, 투오르."

 그리 말하며 투린은 칼을 든 소년을 그대로 안아 올렸다. 한 팔에 한 아이씩 앉힐 수 있을 만큼 투린은 키가 컸고, 아이들은 지나치게 작았다. 랄라이스는 투린의 앞으로 걸어가 아이들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맥락 없는 위안에 니에노르가 미소지었다. 랄라이스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다섯 번의 겨울을 보낸 끝에, 그들은 결국 모르웬과 리안을 포기했다. 아무도 그들의 어머니들이 간 곳을 알지 못했고, 도르로민에 계속 머물기에는 나날이 더해 가는 위험이 두려웠다. 투린은, 처음 돌아온 이래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코 줄어들지는 않았던 도망자들의 무리를 보며 브레실을 입에 올렸다. 랄라이스는 내심 이를 다행스럽게 여겼다. 후린의 아들과 딸을 환영할 곳은 몇 떠올릴 수 있었으나, 하도르 가문의 아이 넷에 부랑자 무리마저 받아들일 만한 데는 브레실뿐인 듯했다. 더군다나 도리아스와도 가까웠으니까.

 산맥을 넘으며 랄라이스는 그제야 멜리안의 꾸러미를 풀었고, 브레실에 다다랐을 때 렘바스는 반의 반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라 식량이 없어진 게 다행이지, 하고 투린이 농담처럼 말했다. 투린의 눈썹 사이에는 이미 주름이 걱정의 흔적인 양 남아 있었다.

 브레실의 젊은 영주는, 글쎄, 하도르 가문의 잔재를 두 팔 벌려 반기지는 않았으나, 투린을 친족이라 불렀고 머물 곳을 마련해 주었다. 조금 더 전사다운 이들은 드러내 놓고 투린을 칭송했다. 그들과 도르로민에서부터 그들을 따라온 이들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랄라이스는 브란디르를 연민했다. 고작해야 투린보다 한 해 늦게 난 젊은이.

 니에노르는 그를 동경했다.

 투린이 딤바르로 돌아가겠다며, 자신을 계속해서 따를 이는 나서라 말하자 랄라이스는 반론을 삼켜야 했다. 최선은 아니라도, 최악은 면한 선택이었다. 검을 잡을 수 있는 에다인치고 용투구를 꺼내쓴 투린을 따라나서지 않을 이는 드물었다. 투린은 조용히 그의 누이들과, 혼인하지 않은 그의 유일한, 아직 소년 태를 벗지 못한 후계자를 이야기했고, 결국 열 명 남짓을 데리고 사라졌다. 랄라이스는 니에노르와 브란디르를 지켜보았다. 치유자 브란디르. 최선은 아니라도, 역시나 최악은 아니었다.


 몇 달 후 투오르는 투린을 만나야겠다며 혼자 딤바르로 향했다. 그는 투린과 함께 돌아왔다.

 "마냥 순진한 생각만은 아니지."

 투린은 그답잖은 차분함으로 지적했다.

 "우리 아버지들이 곤돌린을 찾은 것도 이 근방에서라 했으니까."

 "브라골라크 이후에 이 땅이 적의 하수인들로 들끓었다면, 지금은 모든 나무와 돌이 적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그리고 당신에게는 아들이 없소. 사촌을 그리 쉽게 보내서는 아니된단 말이오."

 브란디르가 곧바로 반박했다. 투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랄라이스는 새삼 그를 다시 보았다. 투린은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그의 오른편에 앉은 벨레그가 그녀와 눈을 맞추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브란디르,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소."

 브란디르를 불렀지만, 투린은 니에노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에노르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투린은 웃음기 어린 어조로 계속해 말했다.

 "내 누이, 후린의 딸 니에노르와 혼인하겠소? 그렇다면 나는 여기 모인 모두를 증인 삼아, 니에노르의 아들을 내 후계자로 삼으려 하오."

 브란디르는 한 동안 말문이 막힌 듯, 그들을 차례로 쳐다보며 침묵했다. 후린의 아들과 두 딸, 도리아스의 요정, 후오르의 아들. 그는 마침내 랄라이스를 보며 물었다.

 "후린의 아들, 당신 누이는 둘이 아니오?"

 "나는 투오르와 함께 갑니다."

 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 사촌동생의 어깨를 감쌌다. 후린의 딸과 후오르의 아들. 투린은 마지못해 쓱 웃었다.



*

그런데 더 잇지는 못하겠음... Urwen 초기 설정에선 아리엔의 옛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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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hi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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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글 2019. 1. 18. 20:19

저번에 쓴 거 좀 이어보고 싶어서



 초여름 도시는 흰빛에 젖어 있고, 하짓날 시답잖은 업무를 맡길 만큼 그들의 왕은 잔인하지 않아, 샘물의 영주는 날이 완연히 새기가 무섭게 제 집을 나섰다. 몇 안 되는 층계를 밟아 거리에 닿으니 지나는 문간마다 연한 빛깔 화환이 내걸려 있어 그는 저 혼자, 햇살에 바랜 것인가, 당치 않은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일러야 전날 저녁에 엮인 꽃들일 터였다. 그러나 그는 괜한 마음에 제 소매를 손끝 사이로 잡았다가, 창가의 누군가 눈길 주었을세라, 다시 턱을 쳐들고 발길을 옮겼다. 아직은 아침 바람이 찼다.

 도시에 꼬박꼬박 문을 잠그는 이는 없었으나 아예 걸쇠마저 마련하지 않는 이는 드물었다. 그는 반 뼘쯤 열린 문을 마저 밀고 빈 복도에 발을 들였다. 드디어, 어쩌면 마침내, 진중한 초록빛이 시야를 메워, 은백색 예장의 요정은 싱긋 웃고야 마는 것이었다. 저가 그랬듯, 집주인 역시 오늘만은 시중드는 이들을 죄 물렸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소리죽여 긴 복도를 밟아나가, 한 번에 두 단씩 계단을 올라, 철의 관문을 여는 양 가만가만 침실 문을 안으로 밀었다.

 한껏 젖힌 휘장 사이로 쨍한 일광이 내리쬐는 가운데, 새하얀 침대보 위에는 금발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문간에 기대 엷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다가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글로르핀델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잔뜩 구겨진 여름 이불을 아이처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웅크린 어깨가 숨소리에 맞추어 깊게 오르내렸고, 등에 달라붙은 셔츠로 뼈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글로르핀델을 흔들어 깨우려다 말고 머뭇거렸다. 셔츠의 흰 천이 흠뻑 젖어 있었다.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투명한 별빛을 굳히고 검날을 축성하는 손길로, 그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모았다. 무릎을 접어 올리며 붙어 앉자 침대 틀이 조용히 끼익거렸다. 결 고운 머리카락은 손가락으로 몇 번 빗어내리는 것으로도 쉽게 정돈되었고, 뺨 밑의 몇 가닥을 살며시 빼낼 때마저 글로르핀델은 뒤척이지 않았다. 언뜻 손끝에 스치는 맨살이 땀과 체온에 뜨끈했다.

 허리춤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그가 거의 다 땋아내리고서야 글로르핀델은 무언가 웅얼거렸다. 그는 땋은머리에서 한 손을 떼어 친구의 날개뼈 가운데 가만히 얹었다. 조금 더 명확한 발음이 들려왔다. 아이카스텔.

 강인한 결의, 또는 혹독한 희망. 어느 틈엔가 글로르핀델은 돌아누워 그의 손을 마주잡았고, 한없이 어린, 물같은 얼굴은 우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황금꽃의 영주는 나직이 속삭였다.

 "꿈을 꾸었어."

 너를 죽였어, 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무슨 꿈을 꾸었던지, 글로르핀델은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고, 답을 독촉하는 대신 엑셀리온은 창턱에 기대 서 그가 잠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기다렸다. 글로르핀델은 옷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가, 생각을 고친 듯 바닥에 구겨져 떨어진 겉옷에 대충 팔을 꿰었다. 엑셀리온은 쯧, 혀를 찼다.

 "그러다 또 허둥대지."

 "의식은 정오니까, 잠부터 깨고 생각해 보련다. 뭐라도 마실래? 집에 먹을 건 없는데."

 그러며 그들은 동시에, 온갖 보고며 명단이 난잡하게 흩어진 탁자 한 구석에 위태롭게 놓인 접시와 먹다 남은 빵 조각을 보았고, 엑셀리온은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글로르핀델은 태연히 장화 끈을 묶으며 말했다.

 "이 앞 광장에서 꿀빵을 파는데......."

 "그리고 오늘은 장사 쉬겠지? 알 만하다. 보자, 위병소에 들르면 뭐라도 있을 텐데."

 친구는 역겹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고,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한 번 거른다고 죽기야 하겠어, 하는 말에 글로르핀델이 활짝 얼굴을 폈다. 도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린 그가 조급하게 제 옆을 탁탁 두드리길래, 엑셀리온은 못이기는 척 다시 그 곁에 앉아 침대 가 너머로 다리를 늘어뜨렸다. 친구의 땋은머리는 벌써부터 서서히 헝클어지고 있었다.

 "머리 좀 푼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니고."

 글로르핀델이 자연스레 투덜댔고, 엑셀리온은 별 말 없이 제 생각을 싼 벽을 조금 더 내렸다. 심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나라도, 아무리 투루카노라도, 그건 아니지. 잠옷 바람으로 추방당할 일 있어?"

 "글쎄, 그대가 그리도 차려입는 것을 귀찮아 하니까 말이야."

 글로르핀델은 양손을 머리 밑으로 베고는 다시 킬킬거렸다. 내가 추방당했다 돌아오면, 들여보내 줄 건가? 그는 아랫입술을 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 성품에 울모같은 후견인은 어림도 없지만, 어지간한 마이아라면 또 모르지.

 "발라라우코Valarauko라도 잡아와야 하나,"

 하며 글로르핀델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라우코Rauko를 잡아오면 마이아로 쳐 주지, 어때?"

 확 찡그린 표정 너머로 엑셀리온은 로그의 거대한 몸집과, 그에 못지 않은 망치의 연상을 읽어냈고, 게으르게 실소했다. 먹구름낀 하늘이 눈 깜짝할 사이 개듯 가벼이, 글로르핀델은 그를 따라 웃더니, 한 팔을 뻗었다. 그가 잠시 뜻을 몰라 망설이자 글로르핀델은 천장을 힐끗 쳐다보고는 아예 윗몸을 일으켜 덥석 그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라우레핀딜?"

 갑작스런 움직임에 예복이 요란하게 부스럭댔다. 글로르핀델은 빳빳한 천에 입김을 뱉으며 속삭였다. 명치에서 조금 빗겨난 곳에 대고,

 "그래, 내가 잡아올 테니까."

 이, 의미는,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엑셀리온은 잠자코 친구의 등을 쓸어내릴 뿐 아무 위안도 건네지 않았다. 이 꿈 아닌 악몽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

요즘 거의 곤돌린밖에 손 안 대는 것 같은데 뽕이 안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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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글 2019. 1. 16. 20:25

뭔진 모르겠고 수소님이랑 썰 풀었던 길갈라드 땡땡랄웬 아들 설



 "부모가 죽는 걸 느낀 적 있습니까?"

 켈레브림보르는 만지작거리던 은사 뭉치에서 시선을 떼어 왕을 바라보았다. 얄궂다면 얄궂은 질문이었기에 그는 함부로 답할 수 없었고, 하기야 길갈라드 역시 흔치 않게 긴장한 기색을 보이고 있기는 했다. 한 손에는 왕관을, 다른 한 손에는 빈 잔을 들고서 젊은 왕은 아무 말 없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켈레브림보르는 나름 정제된 문장을 내놓았다.

 "도리아스가 무너질 때 넌 나와 함께였지요, 에레이니온. 나는 쿠루핀웨의 죽음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발라르의 검은 모래밭에서 그가 주저앉아 소리없이 울었을 때, 고통의 원인을 차마 짐작조차 하려 들 수 없었을 때 그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마른 몸이 있었고, 그는, 상처 하나 없는 작은 손에 탁한 보석 조각을 쥐어주던 아비와, 칭얼이는 조카를 어쩔 줄 몰라 와락 끌어안던 백부를, 그들의 형제들을 생각했다. 천 년 전의 이야기. 그리고, 별빛도 없이 어둑한 미스림 호반에서, 다시 한 번 맹세를 읊는 그림자들 사이로 가슴께를 부여잡던 어린 날이 있었다.

 "무슨 느낌이었습니까?"

 "네가 느낀 것과 크게 달랐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에레이니온. 무엇이 알고 싶은 겁니까?"

 길갈라드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린돈의 겨울 밤은 춥지 않아 화로는 싸늘했고, 탁자의 술병에는 여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고리버들 의자에 걸터앉은 왕은 웃옷 앞섶을 풀어헤친 채였다. 선원의 아들 - 켈레브림보르는 저가 어느새에 미소하기 시작했는지 알지 못했고, 구태여 입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핀웨 놀도란은커녕 핀로드의 것에도 턱없이 못미치는 방에 앉아, 열린 창과 닫힌 문 가운데, 그는 몸을 기울여 왕의 잔을 다시 채웠다.

 "에레이니온. 무엇이 알고 싶었습니까?"

 해변에서 그가 처음 무릎 꿇은 이래 길갈라드는 거듭 지혜로운 친족을 얻어 왔으니, 손끝을 붙잡고 종알대던 소년은 사라지고 없었으나, 그럼에도 켈레브림보르는 질문을 바라며 물었다. 길갈라드는 실없이 웃었다.

 "그렇지요, 한참 후에야....... 그걸 느낀 것이라 할 수 있다면."

 그리 말하며 길갈라드는 잔을 입가에 대었고, 입술이 희게 질리도록 짓눌렀다.

 "에레이니온."

 그는 티리온을, 포르메노스를, 미스림을, 힘라드를, 나르고스론드를 살아남았다. 음성의 떨림을 감추는 일쯤은, 이름 하나로 주의를 돌리는 일쯤은 어련히 손쉬워, 켈레브림보르는 가만히, 왕이 잔을 도로 내리고 눈을 감는 것을 지켜보았다. 죽은 왕들의 젊은 후손은 잠결에 말하듯 속삭였다.

 "텔페린콰르. 도리아스 때, 그 해 겨울에, 내가 몹시 앓았던 걸 기억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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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글 2019. 1. 9. 19:11

 "이번에 앙그반드 놈들이 또 한탕 했답디다."

 엘렘마킬이 책상에 서류 더미를 쾅 내려놓으며 말했다. 에갈모스는 코웃음을 쳤다.

 "앙그반드가? 아니면 페아노르가?"

 "너무 그러지 마십쇼, 어쨌든 우리 편 아닙니까."

 레골라스가 불쑥 끼어들더니, 까악, 하고는 엄지를 엮어 날갯짓 시늉을 냈다. 에갈모스는 실없이 웃고 타자기로 주의를 되돌렸다. 날짜와 발신인만 더하면 될 일이었다. 끄트머리의 문장이 눈에 밟혔다.

 "'다시금 뵐 날까지 부디 안녕히.' 있잖아, 우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날 수 있을 것 같나?"

 엘렘마킬과 레골라스는 어리둥절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고, 에갈모스는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이다가 마저 타자를 쳤다. 네브라스트에서, 투루카노 놀로핀위온. 그는 타자기에서 종이를 빼내고, 투르곤이 손으로 썼던 초고와 함께 봉투에 넣었다. 누런 상자로 가득한 사무실이 유독 좁은 듯 보였다. 엘렘마킬이 힐끗 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하기야 직속도 아닌 상관이 엉뚱한 질문을 던지면 누구라도 당황하기 마련이겠다 넘겨짚으며 에갈모스는 봉투를 레골라스에게 건넸다.

 "보스 서명 받아서 가져와. 오늘은 그것까지만 해주면 돼. 엘렘마킬, 너는 분수가 찾더라. 심부름은 이제 됐으니 가 봐."

 "어라,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다들 사나흘씩은 걸리던데."

 "그 녀석 허구한 날 제 가문과 으르렁거리는 거 알잖나. 이렇게라도 찢어지는 게 다행이지."

 엘렘마킬은 아랫입술을 꾹 씹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레골라스가, 그럼 이만, 하고 목례하며 문을 나섰다. 뒤따라 걸음을 떼는 엘렘마킬의 등 뒤로 에갈모스가 덧붙였다.

 "그리고 누렁이 만나면 이리 보내!"

 엘렘마킬이 문턱을 넘고, 제 심박에 맞춰 스물까지 센 후에야 그는 손을 뻗어 엘렘마킬이 두고 간 서류 더미를 끌어당겼다. 독수리들이 전하는 소식만큼이나 일웨란의 정보는 신속했고, 또 때로는 더 정확하기 마련이었다. 어쨌든, 그가 자부하기로는. 그는 무지개의 오로메를 믿었고, 꿈길의 이르모를 경배했으나 옷세도, 그 주인도 도저히 달가워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에갈모스는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도로 밀쳐냈다. 파란 평면도 한 장이 나풀거리며 시멘트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나중에, 그러니까, 일단 커피 한 잔은 하고서 들여다볼 심산이었다.



*

곤돌린... sf 디스토피아 에유... 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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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hi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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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글 2019. 1. 5. 16:19

니르나이스 2n년 후



 늦은 아침, 엘렘마킬은 지독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 두 눈을 끔벅거렸다. 주변은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았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한 끝에 그는 제가 두 번째 관문의 숙소에 놓여 있는 모양이라고 결론내렸다. 숙소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은 태반이 돌의 관문의 제복을 입고 있던 것이었다.

 엘렘마킬은 머릿수를 거듭 어림해, 잠든 이들의 수가 다섯은 넘으며 스물은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후 도로 눈을 감았다. 그는 용케도 벽에 기대 앉아 있었지만 어쨌든 제 발로 일어서는 데는 가히 영웅적인 노력이 필요할 터였다.

 "괜찮아, 엘렘마킬?"

 그는 눈을 떴다. 깎아지른 벼랑 사이 관문으로 비치는 햇살은 희게 시렸고, 아란웨의 아들에게는 엄숙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미처 자각하기 전에 엘렘마킬은 손을 뻗어 보론웨의 얼굴에 어리는 빛을 가렸다. 그것만으로도 두통이 한결 가시는 듯했다. 아니면 그가 끝내 짓누르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보론웨가 푸스스 웃었다.

 "그래서, 경비대장님, 기분은 어때?"

 그러나 나는 네 목소리를 기억하지, 하고 생각하며 엘렘마킬은 영 딴소리를 뱉었다.

 "다시는 자네와 대작하나 봐라. 자네가 키르단의 친족인 걸 잊었지 뭐야."


 새하얀 침대보 위에 금발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엑셀리온은 문간에 기대 엷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다가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글로르핀델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잔뜩 구겨진 여름 이불을 아이처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웅크린 어깨가 숨소리에 맞추어 깊게 오르내렸고, 등에 달라붙은 셔츠로 뼈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글로르핀델을 흔들어 깨우려다 말고 머뭇거렸다. 셔츠의 흰 천이 흠뻑 젖어 있었다.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투명한 별빛을 굳히고 검날을 축성하는 손길로, 그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모았다. 무릎을 접어 올리며 붙어 앉자 침대 틀이 조용히 끼익거렸다. 결 고운 머리카락은 손가락으로 몇 번 빗어내리는 것으로도 쉽게 정돈되었고, 뺨 밑의 몇 가닥을 살며시 빼낼 때마저 글로르핀델은 뒤척이지 않았다. 언뜻 손끝에 스치는 맨살이 땀과 체온에 뜨끈했다.

 허리춤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그가 거의 다 땋아내리고서야 글로르핀델은 무언가 웅얼거렸다. 엑셀리온은 땋은머리에서 한 손을 떼어 친구의 날개뼈 가운데 가만히 얹었다. 조금 더 명확한 발음이 들려왔다. 아이카스텔.

 강인한 결의, 또는 혹독한 희망. 어느 틈엔가 글로르핀델은 돌아누워 그의 손을 마주잡았고, 한없이 어린, 물같은 얼굴은 우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황금꽃의 영주는 나직이 속삭였다.

 "꿈을 꾸었어."

 너를 죽였어, 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이드릴은 소리없이 몸을 일으켰다. 관도 신도 없이 춤추는 왕녀는 양탄자를 맨발로 딛으며 서너 걸음 나아가, 벽난로 옆에 걸려 있던 푸른 망토를 찾아 둘렀다. 잠옷 자락이 발목에 감겼다. 그녀는 침대를 지나, 요람을 지나, 서랍에서 눈처럼 흰 초 하나를 꺼내 들고는 문을 나섰다. 발꿈치에 와닿는 돌이 차가웠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흉벽에 양 팔꿈치를 짚고 선 뒷모습은 사랑스러운 것이었고, 부러 크게 타박거린 마지막 몇 발짝에 청년은 황급히 뒤를 돌아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곁에 다가섰다. 투오르는 그답잖은 흐릿한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그는 아마, 한 때 그들의 도시가 이 날을 얼마나 성대히 기념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이드릴은 제 입가에도 마찬가지로 뿌연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투오르의 가슴께에서는 이미 흰 초가 흰 돌 위로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타고 있었다. 이드릴은 제 초를 기울여 심지를 맞대고, 불꽃이 일렁이며 옮겨붙는 것을 지켜보았다. 투오르가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날은 다시 밝아올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수많은 예언과 예지를, 한밤에 날아드는 악몽같은 환영을 기억했고, 그 모두를 입에 담는 대신 엄지로 투오르의 손등을 쓸었다. 조금 더 활짝 웃었다.

 "그리고 놀도르의 승리는 위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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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hi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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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글 2018. 12. 18. 16:56

 넬랴핀웨, 부르고서 그는 몸을 숙여 사촌의 머리카락에 짧게 입맞추었다. 여태 다 마르지 않은 적발에서는 차가운 겨울 공기가 묻어났다. 간만의 폭설이라 말이야, 부연하는 사촌의 말을 흘려들으며 그는 수건을 빼앗아 들었다. 마에드로스는 아무렴 어떻냐는 듯 몸을 젖혔다. 그는 이미 축축하다 못해 푹 젖어버린 수건을 침대 발치에 던져놓고는 맨손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쥐어짰다. 화롯불이 타닥거리는 소리 사이로 사촌이 옅게 웃었다.

 "좀 털고 들어오지. 다 녹았잖아, 어쩔 거야?"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네가 이럴 필요는 없는데, 하고 사촌이 중얼거렸다. 그는 아예 손가락을 엮어넣어 머리카락을 털기 시작했다. 사촌은 다시, 그냥 종자를 부를게, 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그가 억지로 주저앉히자 마지못해 한숨을 쉬었다. 핀곤은 못들은 척 궁시렁댔다.

 "이것 봐, 등까지 다 젖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나가는 건데. 하여간에 머리카락이 죄다 얼어서 밀어버릴 지경이 돼야 정신을 차리지."

 "그럼 밀지, 뭐. 편하겠네."

 "그런 소릴 들으면 마칼라우레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마에드로스는 아이처럼 킥킥대다가 고개를 저었다.

 "같이 나가 봤자 볼 것도 없어. 죄 얼어붙은 들판 뿐인걸. 더군다나 이 날씨에 전하를 모시고 나갔다가 무슨 말을 들으려고."

 "여긴 힘링이야, 영주님. 내가 눈밭에서 구르든, 공중제비를 돌든, 콧방귀도 안 뀔 양반들 천지라니까?"

 몇 년 전이었다면 누가 감히 널 무시하냐며 표정을 굳혔을 사촌은, 이젠 그저 싱글거리며 화롯가로 발을 뻗었고, 핀곤은 머리를 말리다 말고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여기가 좋아? 사촌은 대답 대신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

이것저것 보고 싶은 것만 쌓인다... 달달한 거나 포카포카한 거...


안켈 쓰다 만 건 안 끝낼 것 같아서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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