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킨/글 2018. 8. 15. 00:55

예전부터 조금씩 쓰던... 긴 뭔가의 일부분인데 언제 다 쓰려나 싶어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 올려봄. 제목은 Kathleen Mavourneen 한 구절



1.

 "뭘 그리 봐?"

 "글쎄......."

 엑셀리온은 손에 든 은잔을 휘청 기울였다 받으며 웃을 뿐 말을 맺지 않았다. 노스트 나 로시온, 꽃의 축제 마지막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몬 과레스 위 백색 도시에서 세 번째로 맞는 봄이었고 처음으로 성대하게 치르는 축제였다. 글로르핀델은 목에 둘러진 금잔화 화환에서 한 송이씩 꽃을 뽑아내며 티리온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다 되풀이해 물었다.

 "뭘 그렇게 봐? 뭐가 보이긴 해?"

 "그냥 포도주인걸. 점치는 데는 부족하지."

 흐음, 하고 글로르핀델이 손을 뻗어 꽃잎 하나를 잔에 떨어뜨렸다. 노란 잎이 붉은 술에 둥실 떠올랐다. 엑셀리온은 슬쩍 잔을 돌려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이젠?"

 "달의 배가 부서져 내리는데 너는 마른 사장에 서 있고, 하늘에는 불꽃놀이가 찬연하데."

 글로르핀델이 사레들린 듯 심하게 기침했다. 엑셀리온은 저도 모르게 말간 웃음을 터뜨리며 글로르핀델의 등을 두드렸다. 글로르핀델은 눈꼬리에 눈물방울마저 매달고서 억울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농이었어!"

 "농담은 진지하게 하지 말라고!"

 "그래, 그래. 황금꽃의 영주가 이런 새가슴이었을 줄이야 미처 몰랐는걸. 말조심 해야겠어?"

 "진담을 농처럼 하지도 마, 헷갈리니까!"

 그리 말하는 글로르핀델은 사뭇 엄중한 표정을 띠고 있어, 엑셀리온도 덩달아 웃음기를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글로르핀델은 기어이, 그리고 농이든 아니든 말을 삼키지도 않겠다는 다짐까지 받고서야 만족해 도로 꽃을 뜯는 일로 돌아갔다. 엑셀리온은 잔을 입에 대고 홀짝였다. 꽃잎이 입술을 간질거렸다. 연회장의 흰 벽 위로는 창백한 등잔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지나는 이들은 제각기 저마다의 음악에 맞추어 경쾌하게 발을 디뎠다. 희미한 폭죽 소리와 함께 오색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입맞춰도 좋을 법한 저녁이 다해갔다.


2.

"엑셀리온!"

 째진 비명이 광장을 출렁 흔들어 놓았다. 아마 에갈모스의 목소리였을 터였다. 글로르핀델은 손 안에서 제멋대로 흔들리는 검을 그만 놓쳐버렸다. 애써 의식하지 않았던 탄내가 지독했고 황급히 돌아선 시선 끝에는 일껏 치솟았다 쏟아져 내리는 분수가 담겼다. 투명한 물에 어룽거리는 붉은빛에 차마 숨이 막혀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갈도르일까, 누군가 에갈모스의 비명을 받아 질렀다. 엘다르의 예지는 때로 재앙이라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한탄을 그의 머릿속에 새겨냈다. 아아, 너의 이름은 이 땅의 모든 선한 민족에게는 전투의 함성이, 모르고스의 개들에게는 공포가 되겠으나 이 순간 우리에게는 절망이구나. 분수 가문의 병사 몇이 제 팔뚝이 끊어진 듯 울부짖고 있었다.

 여전히 경련 이는 손으로 글로르핀델은 검을 그러쥐어 등 뒤를 노리고 달려든 오르크의 옆구리에 욱여넣었다. 몇 번이고 꿈속에서 되새겨온 상실을 종국에는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은 몹시도 쓰라려서, 회색 강철 같이 질린 낯을 한 샘물의 영주가 피범벅이 되어 내딛은 걸음을 몰랐다는 것은 지나치게 비참해서, 그는 적의 시체를 난폭하게 걷어차 검을 뽑았다. 끈 풀어진 투구가 끝내 벗겨져, 조각조각 무너지는 흰 도시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을, 은으로 몸을 감싼 놀도르의 가인이 추락하는 것을.

 그는 잠자코 난투에 몸을 맡겼고, 투르곤이 탑을 내려오고 왕의 가문이 적을 몰아붙여 그 주변에 제 발로 선 적이 남아 있지 않게 되고서야 뒤를 돌아 백색과 금색의 갑옷을 걸친 병사들이 용을 분수로 넘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불티 속에 안개처럼 스며드는 허연 수증기가 내뻗은 손끝에 닿자 그는 질겁해 경고를 외쳤다. 뜨겁다 못해 살점을 얼리듯 아팠다. 그럼에도 그는 미련이 남아, 다시 싸움에 섞여들기 전 자욱한 연기가 가린 분수를 바라보았다. 왕의 분수라, 엑셀리온이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담담히 이는 자신과 같지 않냐 물었던 대리석 단은 금 가 산산히 쪼개져 있었고 물과 증기는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는 엑셀리온이 고개를 들어 중얼인 말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나는 익사할 테지.'

 차라리 같잖은 말 없이 그의 곁에 쭈그려 앉았더라면, 그는 울음을 터뜨렸을까. 우리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나, 엑셀리온, 나는 아무래도 네가 만도스의 전당을 쉬이 빠져나오지는 못하리라 여긴다. 이 어찌 아니 참담하냐!


3.

 살간트가 비올을 꺼내들어 흥겨운 가락을 켜내기 시작하자마자 에갈모스는 벌떡 일어서 광대처럼 우스꽝스럽게 이드릴에게 꾸벅 절했다. 이드릴이 까르륵 웃고, 옆에서 멜레스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것에 투르곤은 흔치 않은 환한 미소를 보였다. 튕기듯 일어선 이드릴이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고는 에갈모스와 손을 맞대고 한 바퀴 빙글 돌았다. 흰 발이 옷단 아래로 가볍게 박자를 맞췄다. 좀 더 진중하게 아란웨가 멜레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레델은 냅다 투르곤을 일으켜 세웠다. 짝지을 이가 남지 않았다고 궁시렁대는 갈도르를 두일린이 잡아끌자 얼추 스퀘어(square)가 만들어졌다. 펜로드는 눈을 굴리며 글로르핀델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저러지 않아도 되겠지, 하는 눈빛이었다. 글로르핀델은 어깨를 으쓱했다.

 밤비 내리는 미스림 호숫가의 목조 건물은 티리온의 왕성과는 천양지차였으나, 화롯불은 타닥거리며 넓지 않은 방을 데웠고 창틀에 유리 대신 끼운 종이는 따스한 분위기를 더했다. 신다르와 물물교환으로 얻은 양탄자가 춤추는 이들의 발소리를 둔탁하게 바꿔 놓았다. 누가 방의 주인이 지혜로운 투르곤이 아니랄까 봐, 탁자에 한가득 쌓인 종이뭉치 사이로 투박한 포도주병이 몇 자리했다. 교묘히 바느질한 천주머니에 짚을 채워 만든 의자에는 주홍빛 뜨개가 턱하니 걸쳐져 있었다. 글로르핀델은 바닥에 앉아 있기도 물렸겠다, 투르곤이 아레델에게 발을 밟혀 쩔쩔매는 새 냉큼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뒤늦게 그를 본 투르곤이 입을 열기가 무섭게 살간트가 활놀림을 빨리했다. 더, 더, 더 빨리. 에갈모스가 양손을 들어버리기 무섭게 갈도르가 내팽개쳐졌다. 투르곤이 푸하 웃어버리는 아레델을 품에 안고 한 걸음 물러섰다. 이드릴과 두일린이 중앙을 차지했다. 금빛 머리카락이 회오리쳤다. 화로 주위를 하늘색 치맛단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날 때마다 두일린은 저보다 작지 않은 왕녀를 장난스럽게 홱 끌어당기고는 했다. 살간트는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속도를 높였다. 더 빨리, 더, 조금만 더!

 "그만, 그만!"

 두일린이 이드릴의 손을 놓쳤다. 이드릴은 웃으며 스텝을 몇 번 더 밟고는 모자를 들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비올의 끼이잉 소리로 음악이 끝났다.

 "세상에, 왕녀님, 못 당하겠는걸요?"

 "그러게 뭐하러 덤볐어. 좀 비켜 봐."

 뒷말은 글로르핀델을 향한 것이었다. 막 순찰에서 돌아온 참이었는지 아직 머리카락에는 물방울을, 한 발짝 뒤에는 엘렘마킬을 단 엑셀리온이 글로르핀델이 차지한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글로르핀델은 코웃음을 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물 다 떨어진다. 마침 왔으니 노래나 부르던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엑셀리온이 축축한 겉옷을 그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는 숨 넘어갈 듯 폭소하며 겉옷을 쑥스러운 얼굴을 한 엘렘마킬에게 건넸다. 살간트가 다시 활을 올렸고, 아레델과 그녀를 뒤에서 안은 채 정수리에 턱을 얹은 투르곤을 제한 모두가 화로 주위로 둥그렇게 앉았다. 두일린이 펜로드의 무릎을 베고 눕자 작은 소동이 일었다. 엑셀리온이 멋쩍게 목을 가다듬었다. 글로르핀델은 엘렌웨를 빼닮은 이드릴이 멜레스에게 기댄 것을 보며 문득, 조금의 죄책감과 함께, 살아남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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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hi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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