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님께,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 쓰기
그렇게 천천히 잊히는 것이라고 했다.
"투람바르!"
니니엘은 크게 외치고 웃었다. 햇살같은 맑은 얼굴을 잔뜩 찡그려 가며, 무엇이 그렇게나 유쾌한지,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에게 마주 미소를 지어주며 투린은, 아니, 투람바르는 목탄을 내려놓았다. 브레실에서는 질좋은 종이는커녕 피지 한 장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자작나무 껍질은 꽤 괜찮은 대용품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슨 대단한 예술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럭저럭 흰 배경에 윤곽만 잡힌 집의 비뚠 기둥이 그를 방증했다.
"투람바르, 그렇게 앉아만 있다가는 땅에 뿌리를 내릴 거예요. 봐요,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갠 하늘이었다. 발목 언저리에 돋은 짧은 풀은 정오 아래 싱그럽게 빛났고, 작은 공터는 니니엘의 존재만으로 꽉 차올랐다. 나무둥치에 기대 앉은 투람바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때로 그의 연인은 한없이 천진했다.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니니엘, 내 사랑."
그러자 니니엘은, 그렇게 우아하지만은 않은 콧방귀를 뀌고서, 다시 까르르 웃으며 달려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는 화악 볼을 붉혔다. 입맞춘 자리가 식상하게도 데인 듯 뜨거웠다. 빙그르르 돌아서는 니니엘의 몸짓에는 이미 춤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잊히는 것이라고 했다.
누가 그리 말했었는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아, 또다른 누군가가 말했을 듯, 모든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며 기억이 예외일 리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는, 가을 밀밭 같고 막 엉기는 버터 같은 머리카락의 사랑스런 여인을 보며 피나르핀 가의 찬란한 금발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녀 발치에 핀 봄꽃을 보며 붉은 세레곤을 떠올리지 않았다. 인간답게 묵직한 걸음을 보며 첫눈 위를 흔적 하나 없이 달리던 사냥꾼을 떠올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드루아단 석상의 코끝을 어루만지는 키큰 소녀를 보았고, 만족했다.
그리고 무엇을 떠올리지 않을지마저 잊었다.
(왜냐하면 도르로민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잊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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