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킨/글 2018. 9. 3. 23:54

뒷부분 유혈주의...라고는 하지만 별 거 없음



 걷는 것을 좋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배낭 하나 걸쳐메고 홀로 크하잣둠에 다녀오는 길에, 두 그루 호랑가시나무 아래서 안나타르를 만나 함께 걸었던 적이 있었다. 아침 하늘은 티 하나 없이 깨끗했더랬다. 만났다고 하기도 어려웠던 것은 안나타르가 나무 기둥에 몸을 가리고 섰었기 때문이었고, 또 그가 안나타르를 보고 눈웃음으로 인사하자마자 기다렸단 듯 그의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보조를 맞췄던 탓이었다. 그 움직임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켈레브림보르는 그만, 설마 날 마중나온 거냐, 물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조악해."

 열 발짝 걷기도 전 무작정 건네진 악담에 그는 이마 언저리까지 흘러내린 화관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답했다. 조악하다니, 요정 아닌 누구라도 동의 못할 평이었다. 요정이라도 유난히 입이 거친 자가 아니라면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을 터였고. 꽃잎은 흉져 있었고 나뭇잎은 칙칙했지만, 명주실에 꿰여 묶인 유리구슬은 몰취미했지만, 그러나 저러나 켈레브림보르는 화관이 썩 마음에 들었었다.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난 거야?"

 "어디게? 알아맞히면 이건 널 주지."

 그딴 걸 내가 원할 것 같아? 안나타르는 궁시렁거리면서도 흥미롭다는 듯 고양이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서 코를 가까이 대고 요란하게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켈레브림보르는 킬킬거리며 안나타르를 밀쳐냈다. 그가 감정을 드러낼 때면 그 결이 어떻든 켈레브림보르는 미묘한 만족감을 느끼고는 했다. 세상에 오롯이 매인 존재, 급은 덜할지언정 발라르와 같은 이. 그러니 이 자는 아르다를 바라보아야 옳았다.

 "흠. 모리아 서문에서 두 번째 마을. 거기가 아니면 이런 걸 팔 곳이 없는데."

 "미안하지만 장소도 경위도 틀렸어. 산 게 아니라 받은 거거든."

 안나타르는 세공장에서 금사가 형편없이 엉킬 때와 똑같은 동작으로 양손을 펴 들었다.

 "권능을 쓴다면 불공평하다고 할 테지?"

 "이번만은 봐 주기로 할까? 네 마음대로."

 의식 언저리에 유연하게 와 닿는 탐침은 친숙한 것이어서, 그는 별 노력 없이 기억을 갈무리해 치워 놓았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난쟁이들이 이제 광산을 한 층 더 확장하기로 했다더라며 화두를 던졌다. 안나타르는 능란하게 말을 받아 이었다. 탐욕이 도를 넘었군. 땅 깊이 무엇이 있나 제대로 알지조차 못하면서 눈 닫고 귀 막아 파고드는 꼴이 실로 오만하지 않은가. 언제나처럼 과격한 의견에 켈레브림보르는 웃음을 흘렸다. 과장 반에 남은 것 반은 허풍이라. 허나 걸러듣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안나타르'의 힘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광산에서 별달로, 무역로로, 엘렌나의 확장 으로 이리저리 경쾌하게 튀는 대화 틈바구니에 그가, 네 친구네 손자는 조부를 그리 닮진 못한 모양이야, 자못 능청스레 끼워넣자 켈레브림보르는 푹 한숨을 쉬며 화관을 벗어들었다.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글쎄, 너무  문제가 쉬웠잖아? 방심하지 마, 페아나린케."

 "머리나 갖다 대시지요, 아 위대하신 아울레의 권속이여, 서녘의 사자여. 관을 씌워 드리리다."

 검은 나무가 현무암 기둥처럼 솟은 티리온 궁정에서나 어울릴 법한 허리숙인 인사에 안나타르는 박장대소하며 무릎을 굽혔다. 켈레브림보르는 화관을 얹으려다 말고 손을 멈췄다.

 "조악하다면서?"

 "조악하든 말든, 꽃은 시든 뒤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냥 꽃은 아니지, 우리 반지가 곧 금속과 보석인 것은 아니듯."

 선물의 군주여, 이 화관은 은의 손이 받아 자유로이 내드리는 선물일세. 꽃은 사랑스러우나 화관은 사랑할 만하고, 자유로운 선물은 사랑받음을 필요치 않아. 안나타르는 반박하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켈레브림보르는 짐짓 다시 걸음을 떼었다. 안나타르는 성큼 그를 쫓았다.

 "그래서. 버릴 거야?"

 "사랑할 필요 없다면서?"

 켈레브림보르가 키득거리며 되물었다. 맙소사, 안나타르, 삐진 거야? 마이아는 새삼스럽게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그건, 걷는 것을 좋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의 일이었고, 가을바람은 선선했고, 등뒤에는 위대한 난쟁이의 도시가, 저 앞에는 오스트 인 에딜이 있었다. 늘어진 그림자는 서녘을 가리켰다. 그는 안나타르의 뒷목을 잡아내려 슬쩍 화관을 씌웠고, 떨어지는 손을 안나타르가 붙잡아 손가락을 엮었다. 생각해 보니까, 말려서 간직하는 게 낫겠어. 그러면서 마이아는 머쓱하니 웃었다.


 그때 넌 참 예쁘게 웃었는데. 난 있지, 쓸데없는 것만 물려받아서, 웃으면 딱 아버지를 닮았단 소리도 많이 들었어. 전에 했던 이야기던가. 터진 입술이 잔뜩 쓰리도록 입꼬리를 당기면서 켈레브림보르는 눈을 치떴다. 안나타르는 뒤로 물러나 쭈그려 앉았다.

 "페아나린케. 어리석고 안쓰러운 내 사랑."

 화려한 얼굴에는 표정이랄 게 없었지만 턱을 잡아 추켜올리는 손길은 집요했다. 그는 안나타르가 뭐라 말을 이을지 알고 있었다. 몇백 번을 반복해 이골이 난 설득이었다. 그러니 딱 한 번, 딱 한 번만 선수를 쳐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이곳에는 듣고 비웃을 이조차 없잖은가.

 "반지를, 말야, 안나타르. 세 반지를."

 "그래, 내 사랑, 이제 돌려줄 생각이 든 거야? 그럼 그렇지!"

 왜 그가 사랑한 이는 이 순간에조차 찬란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의 모든 말과 몸짓에 젖어든 욕망은 어쩜 그리 추악해야 하는지. 켈레브림보르는 가까스로 얕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세 반지를 네게 선물한다면, 받아들이겠어?"

 채광창으로는 햇빛이 환하게 비쳐들었다. 누구였더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요정이 있었다. 곤돌린 출신이었는데. 공방을 확장할 때 창유리를 만든 게 그였다. 창에 부리부터 내리꽂히는 새가 하루에도 한둘이 아니게 되고서야 얇은 종이를 덧대는 걸 허락했었다. 새 때문에 그를 실컷 닦달했던, 그, 켈레보른을 따라왔던 신다르 중 하나였나, 그녀는 그가 온실 짓는 데 크게 도움이 되자 기꺼이 그와 화해했고. 그녀에게 동생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유독 인간을 좋아해 누메노르인 제자를 여럿 들였었던 이였는데, 장례 때마다 꼬박꼬박 먼 바닷길을 다녀오고는 했었지.

 핏물 흐르는 돌바닥은 카란시르를 따르던 이의 솜씨였고, 물이 빠져나가는 배관을 설계한 건 남쪽에서 올라왔다는 인간 청년이었다. 바닥을 구르는 세공 도구는 어느 난쟁이가 배움의 대가랍시고 넘긴 것들이었고, 그리고, 책장을 가득 메운 것은. 눈에 닿는 것이 고작 방 하나일 때 세계는 얼마나 좁아지는지. 눈에 닿는 것이, 고작해야 얼굴을 형편없이 일그러뜨린 사람 한 명일 뿐일 때.

 "선물해?"

 목소리가 거칠었다.

 "내가, 안나타르, 세 반지를, 자유로운 선물로써 네게 내준다면, 받아들이겠어?"

 "그 반지들은 원래 내 것이야. 온전히. 지금 네 처지를 모르나?"

 딱딱하게 가라앉은 답변 밑을 메운 분노를 듣기는 까다롭지 않았다. 안나타르가 그를 아는 만큼, 어쩌면 그것보다도 훨씬 더, 그는 안나타르를 이해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근거없는 믿음도 아니었다.

 "상황 파악 못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닐 텐데. 돌려받아야 할 게 있는 자는 너야."

 주먹을 보는 것보다 목이 꺾이는 게 먼저였다. 켈레브림보르는 실성한 듯 웃다가 혀를 깨물었고, 쇳내에 구역질하며 또 다시 웃었다. 안나타르, 안나타르, 나는 네게 기회를 주는 거야. 안나타르는, 사우론은 단검을 벼리며 짓던 미소를 그대로 입가에 띄우고서 손톱을 그의 목줄기에 박아넣었다. 어디를 쳐야 할지에 대한 완벽한 확신은 그들에게 공통된 것이었기에 그는 기어이 부은 혀를 움직였다.

 "하지만, 고르사우르, 주는 건 내 자유지."

 그러니 실컷 발악해 봐.



*

집어넣을 구석은 못 찾았지만 켈레브림보르가 핀로드 생각도 했었음 좋겠고... 톨 시리온 생각도 했었음 좋겠고... 골룸이 생일 선물 타령한 것도 넣고 싶었 따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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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hi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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