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님이랑 썰 풀다 생각난 거
"네가, 어떻게 네가!"
쿠루핀이 짓씹듯 뱉어낸 단어들은 마디마디 동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핀로드는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내가 뭘 말야, 쿠루핀웨?"
"순진한 척하지 말라고, '폐하'. 그 회색망토 버러지가 한 요구가 무슨 의미인지 뻔히 알면서!"
”엿듣고 있었나? 아무리 너라 해도, 좀 유치한데.”
빛나다 못해 희게 번쩍이는 두 눈을 핀로드는 가만히 응시했다. 두 나무의 빛이 몇백 년을 뛰어넘어 그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나, 그 또한 칼라퀜디, 서녘의 높은요정이었다. 쿠루핀의 신경질에 겁먹을 리 만무했다. 그를 알아챈 듯 쿠루핀은 곧 제 분노를 거두어들였다. 그는 흡사 애걸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핀다라토, 엘웨는 그 보석이 누구 것인 줄 알면서도 네 인간에게 그 따위 임무를 준 거야. 한 번에 딸의 구혼자도 처리하고 우리도 모욕하려는 거라고."
"우리?"
핀로드는 낮게 물었고 쿠루핀은 잠시 침묵했다. 핀로드는 시선을 손끝으로 떨구었다. 바라히르도, 오랜 옛날 베오르도, 그 모든 아이들도 이제 썩고 없는데, 그럼에도 요정의 육신은 끈질기기 쇠같아, 가문의 반지가 끼워져 있던 손가락에는 둥근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우리란 건 뭘 뜻하는 거지? 나르고스론드? 놀도르? 페아노르 가문? 아니면 단지 너희 형제들 뿐인가? 그도 아니라면 너와 티엘코르모 뿐인지도 모르겠군. 텔페린콰르는 네 주머니 속에 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페아노르를 가장 닮은 아들이 할 말을 잃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냉랭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핀로드는 작게 미소했다. 아쉽게도 쿠루핀은 곧 말문을 되찾았다.
"당연히 우리 모두를 말하는 거지. 우린 친족 아닌가? 핀다라토, 네가 그 망할 인간을 돕는다면 나는 너와도 싸워야 해.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로스가르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나?"
한 순간 쿠루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의 말마따나 그들은 친족이었으니, 날선 대화 내내 그들은 정신의 가장자리를 맞대고 있었으나 쿠루핀은 이제 그마저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핀로드는, 글쎄. 불탈 때는 아무렇지 않던 쿠루핀의 눈은, 차게 식어내려서는 되려 소름끼쳤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러면 복수인가?"
쿠루핀이 시리도록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핀로드는 한 손을 뒤로 뻗어, 태피스트리 사이로 드러난 돌벽을 쓸었다. 그의 왕국. 왕좌 앞 치솟는 분수부터 발치의 모래알까지, 어느 것 하나 그의 힘이 서리지 않은 것은 없었다. 나르고스론드가 곧 그의 보석이었고, 그는 마땅히 상속을 두려워했다.
"쿠루핀웨 아타린케, 잘 들어. 난 이 회랑을 지나 내 백성 앞에 설 것이고 내 뜻을 밝힐 게다. 날 방해하려거든 마음대로 해. 허나 내 장담하는데, 페아나로의 아들, 넌 나를 죽이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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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한! 외치고서 에오윈은 크게 웃었다. 로한, 리더마크, 에오를! 밀밭같은 금빛 머리카락이 세찬 바람에 휘날렸다. 폭넓은 치맛자락은 굳게 선 양 다리를 감고 돌았다. 초원이 파도치는 바다처럼 일렁였다. 세오드윈의 딸은 진흙 빛깔 외투를 벗어던졌다.
"이 땅이 어찌나 그리웠던지! 오라버니, 맙소사, 메두셀드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겨울바람이 태피스트리를 어지럽히고 늦은 밤 기사의 귓가에 속삭이나요? 새 시대의 새벽에 단 하나 변하지 않길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에오메르는 너털웃음으로 답했다. 에오윈, 에오윈, 내 누이! 여울을 건너자마자 푸르게 펼쳐진 초원에 에오윈은 온 넋을 빼앗겼고, 어깨 너머로 곤도르의 젊은 섭정은 피곤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에오윈은 햇살을 닮은 환한 얼굴로 연인을 돌아보았다.
"파라미르! 전쟁과 죽음 외의 이유로 이 땅에 발딛는 건 처음 아닌가요? 보세요, 까마귀 떼는 걷혔고 장례는 끝나, 들판은 다시 빛나는걸요!"
"그리하여 이제 말과 기수는 어디 있습니까? 날리던 밝은 머리카락은?"
고서를 읽는 말투로 왼 파라미르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제가 던진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는 에오메르에게 손을 내밀었고, 에오메르는 망설임없이 그와 팔뚝을 맞잡았다.
"마크의 왕, 건강하신 것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나보다 기쁠 리가요!"
그리고 그제야 에오메르는, 그들이 거의 처음부터 로히릭으로 대화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슬쩍 제 연인 옆에 붙어 선 에오윈이 파라미르와 팔짱을 끼며 그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에오메르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에오윈의 신다린은 끔찍할 텐데요."
"오라버니보단 나아!"
파라미르는 난처한 체 양손을 들어보였다.
"에오윈보다도 끔찍하시다면야......."
에오윈은 배신에 치를 떠는 눈빛을 보내다 말고 에오메르의 품에 덥석 안겨들었다. 오빠, 나 이혼할래! 답지않은 어린 말에 에오메르는 누이의 머리를 쓱쓱 헝클었다.
"그래, 전쟁쯤은 불사해야겠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쯤은 해줄 수 있지."
"엘렛사르께서 아시면 전 죽은 목숨이겠는걸요."
파라미르는 체념한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에오윈은 에오메르의 품 안에서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아, 내 사랑, 내가 당신한테 그럴 리 없잖아요!"
*
엘보론 가졌을 때쯤 로한 놀러온 에오파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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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시간이 없으니까 생각나는 것만 쓰게 된다 다고르 다고라스 글로엑셀... 에휴 에오파라 빨리 끝내야지
얘네 참 해석 안 변한다 진짜
검
같다고
생각했었다.
놀랄 일인가? 아니, 그는 그리 여기지 않았다. 어렴풋이, 왕족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상대가 핀웨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핀웨 놀도란은 완전한 놀도였으나, 미리엘도, 인디스도 그런 전형적인 놀도르의 미감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그리고 왕족의 아름다움은 말하자면, 힘과, '노래'에서의 '위치'와, '결말'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다시 정의하자면, 혈통에서 비롯된 것.
상대는 오롯이 빛났다.
그것은 역시 왕족과는 다른 빛인지라 투르곤과 아레델이, 이드릴이 빛을 담은 그릇 그 자체로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할 때, 상대는 늘 가림막의 인상을 주고는 했다. 가림막이 있기에 그 너머의 빛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찬란한 빛은 언제나 상대의 테두리를 흩고, 정작 그의 육체의, 반듯한 이마와 먹구름 같은 회색 눈의, 답지 않게 마르고 강인한 손목의, 믿기 힘든 허약함을
지워버리고는
했다.
그래, 상대에게 역시 '이야기'가 주어졌으리란 것을 그는 의심치 않았다. 그 자신이 크릿사이그림의 바위를 꿈꾸듯.
그러나 그는
상대가 왕의 분수에 손을 담그고 나직이 성대를 떨며 노래할 때면 차라리 제 손으로 그 목을 쥐어 조르고 싶어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눈길을 돌리고 말았으며 그 은백색 예복의 가없이 어리고 결코 젊지 않은 요정 군주의 무방비한 등에 긴 칼을 꽂아넣으려는 욕망에 쥐어진 주먹의 손등 위로 돋는 핏줄을 바라보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검 같다고 생각했었다. 잘 벼려져 새파란 빛을 뿌리는 한 자루 검과 같은 사내. 검의 아름다움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흠잡을 데 없는 중심과 위태로우리만치 바짝 선 날, 겹겹이 축복의 말이 얹힌 균형추.
그에게 주어진 것이 수정 방패와 은빛 무구 뿐인 사실은 차라리 당연했다. 냉엄한 희망.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라 결코 하나의 절망에 무릎 꿇지 않을, 언젠가 들려올 나팔 소리를 기다리며 산산이 부서지는 심장의 고동만은 간직할, 그들의 검. 그의 이름은 전투의 함성이 되리라.
마땅한 일이었다.
"……언행불일치잖아."
닥쳐.
상대는 한숨을 흘렸다. 절그럭, 하고 수갑이 손목뼈에 부딪쳤다. 마음만 먹으면 음 하나로도 끊을 수 있을 수갑을 상대가 놓아두는 것은, 묶이지 않은 다리로 자동차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지 않는 것은, 아직 신뢰가 다하지 않은 까닭일 테다.
"라우레핀딜. 이러지 마."
그리고 그 사랑스런 목소리에서 권능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마저도, 상대가 제 사람에게는 끔찍히 약해, 차마 의지를 강제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그는 어찌 들으면 실소일 수도 있을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닥치라고. 재갈을 물려버리기 전에.
"라우로. 제발. 난 돌아가야 해."
가서 죽으려고?
그 질문을 소리내어 말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상대는 어쨌든 알아들은 모양이었지만. 찌그러진 승용차의 조수석에 앉아, 깍지낀 두 손을 머리받이 뒤로 넘기며 기지개를 켜는, 일곱 시대를 넘어 지상에 돌아온 놀도르의 가인은 조용히 대답했다.
"염병하네."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상대는 대꾸 없이 긴 다리를 턱턱 접어 대시보드에 올려놓았다. 먼지낀 검은 가죽장화에 마찬가지로 검은 청바지. 적갈색 후드. 낮을 대로 낮은 채도만 제외하면 오랜 옛날과는 양 극단을 달리는 차림이었다. 뒷목을 덮을락 말락 하게 잘라버린 흑발은, 상대의 말에 따르면, 애도의 상징이었다. 글쎄. 그의 생각에 주인 잃은 긴 땋은머리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분노하고 있잖아, 너.
"언제부터 날 그리 잘 알았다고."
으음. 화났어?
"기억상실증이야? 방금 뭐라 했는지도 잊었나?"
예법에 어찌나 철저하던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신병들에게는 그 화신으로마저 여겨지던 샘물의 영주는, 몰락 날 고스모그를 앞두고 오르크라도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소리를 지껄였다고 했다. 적어도 그는 그리 들었었다. 분명, 네 아비가 거미 새끼에게 다릴 벌려 널 낳았다지,는 시작에 불과했었는데. 사람과 거미와 사람의 형체를 취한 아이누의 생태에 대한 더 많은 것을 강제로 알게 되지 못한 채 검과 채찍이 맞닿은 것이 차라리 다행일 정도로.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에게 검이 있다고 항상 검을 뽑아 휘두르고 다니지 않는 것처럼, 언어도 다스려야만 하는 게야, 글로르핀델. 섣부른 말은 상처를 주지. 그러나 이제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비꼬고 비틀어 가시를 세워냈다.
이야기가 와전되는 데는 삼천 년이면 충분하여, 갓 완공된 임라드리스에서 그가 들었던 설화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불러주던 자장가를 입에 올리고 고스모그에 맞선 고결한 요정. 작은 아이야, 두려워 말거라. 폭우는 몰아치고 천둥은 지척을 울리나, 두려워 마라, 내가 여기 있으니.
저 말이 정말이냐 묻는 엘론드의 어린 아들들에게 그는 그저 웃어 주었었다.
"이봐, 라우로. 이제 와서 날 무시하겠다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그럼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나 말해 봐. 돌아가는 길은 알아?"
돌아가서 뭐하게?
상대는 넘긴 손으로 의자 머리받이를 감싸 안았다. 영혼에까지 자취를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 지독한 화상은 애초에 그 피부에 닿지도 않았던 것마냥 사라졌으나, 살을 에는 얼음이 남긴 잔금 같은 흉은 여전히, 마디 뚜렷한 열 손가락의 끄트머리에 인장처럼 박혀 있었으니. 헬카락세에는 상대의 핏방울이 남아 있을까? 역겨운 생각이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씹었다.
"돌아가야지. 의무니까."
또 그걸 죽이려고?
"그래. 아마 성공할 거야. 지금까지는 어김없이 수레바퀴가 돌았으니까."
다시 가라앉은 어조였다. 결국 그런 식이었다. 한없는 눈물이 뿌려지고, 상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그댄 내게 죄지을 수 없어, 였었다. 일곱 번째 배를 두고 상대가 투르곤에게 비명을 질러 가며 뻗대었을 때, 무작정 후려친 손의 끝에 있던 것이 바로 이 음성이었다. 이미 물을 들이쉰 자의 둔탁하고 지친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찢고 망각에서 가장 먼 곳에 자리잡았었다.
항상 우리에게 유리하지는 않았었지.
"대개 우리에게 불리했었지. 뭐가 그리 새로운데?"
바다.
"흠."
바다. 우린 바다로 갈 거야. 그 잘난 물의 영주께 보여 드려야지 않겠어. 신의 총애가 의미하는 게 무언지.
"이미 충분히 보셨을걸."
차체가 덜컹거렸다. 아스팔트라도 깔린 도로는 점점 사라지고, 봄 햇살에 언 강이 녹듯 흙길이 헤드라이트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밤이었다. 그의 모든 감각은 지금, 오후 네 시의 태양이 있을 자리에 상현달이 떠 있어야 한다 성마른 소리를 내질렀다. 달은 없었다. 태양은 기억을 간직하지 않았다.
오늘, 전장에서 네 이름을 불렀노라고, 꾹꾹 눌러쓰고서, 그는 기어이 솟아오르는 흐느낌에 몸을 들썩였었다. 오늘 네 이름을 불렀어, 엑셀리온. 네 이름이 어느새 승리의 상징이 되어 있어서, 그 어린 것들에게, 나는 도저히 우리 싸움을 설명할 수 없어서, 오늘 네 이름을 불렀어.
"울어?"
그는 오른손을 운전대에서 떼어 눈시울을 벅벅 문질렀다. 그가 감정을 숨기는 인물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상대 앞에서라면 그는 늘 곱절은 거리낌을 잃었다.
"참나. 제멋대로 하고 있으면서 울기는."
매정하네.
"울어라, 그래. 실컷 울어."
네가 할 말이야?
"뭐 어때. 날 보고 신의 총애니, 뭐니 하기에는 그대도 잘한 건 없어."
확실히 상대는 달라져 있었다. 자루 없는 검처럼, 도저히 다룰 길 없는 이 무기를, 그럼에도 들어 적에게 겨누기로 한 자는 누구인가. 날을 움켜잡아 피 흘릴 자는 누구인가. 그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상대는 여전히 대시보드에 다리를 올린 채였다. 앞유리창에 왼발을 대고 오른발로 뒤축을 밟아 장화를 벗었다. 회색 양말 신은 발가락으로 라디오 버튼을 멋대로 누르다가, 잡음에 이내 한숨을 쉬며 다리를 도로 모았다. 장화 한 짝이 차 바닥으로 툭 하고 내려 앉았다. 그들이 라디오 전파가 잡히지 않을 만큼 문명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잡힐 전파가 없을 만큼 문명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에 가까웠다. 급히 고른 차는 이륜 구동이라, 길이 험해질수록 엔진은 요동을 쳤다.
"불 켜면 안 되지?"
안 되지, 그럼. 안 보여.
헤드라이트가 껌벅였다. 차라리 불을 켜는 편이 나을 법도 했다. 그 얼굴, 네 얼굴을 한 번만 더 보면 안 될까. 안 되지, 그럼.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에 그는 그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눈꺼풀 안쪽에 그려낼 수 있을 만치 잘 아는 이목구비라도, 그 뒤의 영혼은 한낱 상상이 담을 수 없는 것인지라, 사실, 명백히 다른 자아를 일루바타르의 자식은 끝까지 이해할 수 없게끔 되어 있는지라, 그는 상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화들짝 놀라고는 했었다. 처음 몇 년 간은.
그 다음 몇 백 년 간은.
"생각을 좀 해 봐라. 한 번 죽는 거랑, 한 시대를 사는 것. 우리 중 누가 더 신들에게 아등바등 매달린 거냐?"
너도 한 시대를 살았지.
"그대도 한 번 죽었고. 그리 치면 그댄 두 시대를 산 셈인데."
곤돌린을 증오했으면서.
"운명을 증오할 수 있어?"
장화 위에 떡하니 걸친 발이 발가락을 꿈지럭거렸다. 그는 짜증을 억누르며 눈길을 찢어 길 앞쪽을 바라보았다. 길 양쪽으로, 용케 아직까지 멀쩡한 울타리 너머로, 이 지방 특유의 너른 초원이 펼쳐졌다. 아르드갈렌, 혹은 안파우글리스. 용이 온다면, 아르드갈렌을 닮은 이 들판이 재로 부서지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뭐, 그야 위대하신 분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에아렌딜? 투오르?"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그 인간을 구하려던 거였어?
만약 상대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뭐라 생각해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몰락 날 투오르가 간신히 메고 온 축 늘어진 몸을 기억했다. 희게, 회색으로 질린 얼굴에 담긴 감정을 도저히 읽지 못했던 것을 기억했다. 모두가 공포에 사로잡혀 지레 뒷걸음질칠 때, 홀로 앞으로 나서던, 제 피와 적의 피를 뒤집어쓴 상대를 기억했다. 그 의문은 끝내 그의 차례가 돌아와, 그가 산맥을 차고 뛰어오르는 순간까지,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네가 그렇게 죽는 것보다, 사는 게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냉철하던 네가 고작 이 생각을 안 해 봤을까.
"비밀 하나 알려줄까?"
그래.
"넌 항상 떠오르는 걸 그대로 말해 버리지. 사내의 손에 죽지 않으리라 따위의 예지를……."
데른헬름, 데른헬름! 그러나 미나스 티리스의 흰 성벽 위에서, 젊은 섭정의 손을 잡고 선 것은 치유자 에오윈이었다. 그 시대에 필요한 것은 전사가 아니었으니까. 세오드레드의 누이는 펠렌노르에서 죽었다. 시대를 넘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이야기, 노래 뿐이었다.
"나는 아니었어."
아니야, 가 아니었다. 아니었어. 아니. 부정의 과거형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을 터였다.
"설령 그것이 아이누르의, 또는 에루의 의지라 해도, 적어도, 최소한의 이유만큼은 알기를 바랐거든. 이해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때, 그 분수 앞에서,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 저건 내가 죽여야겠다."
으음.
"나는, 라우레핀딜, 맹세컨대 그 순간만큼 살아 있었던 적이 없어."
운명에 매여서?
"그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
그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타이어가 괴성을 질렀다. 어째서? 그들은 바다에 있었다. 검은 모래가 사방으로 흘렀다. 조수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달이 사라지니, 눈으로 보아 알게 된 것들. 태양 역시 밀물이며 썰물 따위를 만들 수 있었다. 말라죽은 갯벌은 그리 생각 않겠지만. 텔페리온의 꽃과 라우렐린의 열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는 애써 무시했다. 그는 망할 신학자가 아니라고!
그러나, 태양은, 지고 있었고, 그 뒤로 거대한 목구멍을 드러낸 것은, 분명,
"밤의 문이로군."
뭐가 그렇게 태연한데!
"알고 있었잖아. 떠나면서부터."
알고 있었다. 단지,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오감과 오감 이상의 감각에 예지와 직관과 엉터리 희망을 불어넣는 그 무언가가 알고 있던
예정된 절망.
"예정된 종말이지."
밤……이었는데.
"세상이 늘 이러니까. 한 겹 뿐인 어둠을 밤이라 여길 때, 진정한 밤이 찾아오는 거야."
뭐가 그렇게 태연한데.
황혼의 햇살이 빗겨 비친 손이 운전대 위로 그의 손을 겹쳐 쥐었다. 손목의 수갑이 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른 한 손이 그의 턱을 잡고 얼굴을 돌렸다.
"나를 봐, 라우레핀딜."
"얼굴 보는 거, 이게 마지막일 텐데."
그는 가속기를 내리밟았다. 운전대를 거칠게 꺾었다. 상대는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양손을 뗐다. 그제야 제 자리에 똑바로 앉아, 안전벨트를 당겨 매는 육체는, 한 순간 마지막 햇빛 속에 지나치게 날카로운 가장자리처럼 희미해졌다가
이내
그림자로 가라앉았다.
아, 얼굴, 못 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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