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킨/글 2018. 8. 25. 22:59

4시대 발리노르임



 네 검을 보았어.

 난데없는 말에 친구는 응, 심드렁히 대꾸하며 그를 돌아보았고, 글로르핀델은 몸을 뒤로 젖히며 양손을 모았다. 발리노르의 저녁은 가운데땅의 한낮과 같았으니 지금 내리쬐는 금빛은 따지고 보면 정오의 햇살이렷다. 큼직한 유리창 바로 밑에 빈 공책을 펴두고 펜대를 굴리는 친구는 풀어진 자세 덕인지 무척 편안해 보였다. 익숙치는 않은 모습이었다.

 "어느 검?"

 그저 웃음이 났다. 글로르핀델은 수수께끼 놀이라도 시작해 보려다가 자칫 정작 하려던 말은 잊어버릴 수도 있겠단 생각에 입을 꾹 닫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엑셀리온은 다시 공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음표가 빼곡했다. 뭔가 억울해진 글로르핀델이 성급히 다시 말을 이었다.

 "오르크리스트."

 "아. 물에 잠겼을 줄 알았는데."

 "떨어뜨렸었잖아?"

 엑셀리온은 푸흐 실없이 웃으며 공책을 덮었다. 기지개를 펴는 팔에는, 깍지낀 손가락에는 상처 하나 없었고 그것마저 낯선 것이었다. 머리카락에 엮인 은사 장식에 햇빛이 반짝였다.

 "벨레리안드가 가라앉았으니 곤돌린의 폐허와 함께 수장되었으리라 여겼거든. 그걸 그대가 보았단 말이지."

 "그렇게 오래 전 일은 아니야. 임라드리스에서 일인데, 용을 잡으러 가던 난쟁이왕이 트롤 소굴에서 찾았다고 했었어. 경황이 없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나름 대단한 모험이었다던걸."

 사실 그 일행이 임라드리스에 꽤 오래 머물렀다는데, 나는 일이 있어서 마지막 날 밤에야 그와 마주쳤었어서. 부연하며 글로르핀델은 탁자 위로 양발을 턱 올렸다. 엑셀리온은 말리기도 귀찮다는 듯 물잔을 그의 발치에서 멀리 떼어 놓을 뿐이었다.

 "하지 전날이었어. 어째 많이 보던 검이 웬 난쟁이 양반 허리에서 달랑거리고 있길래......."

 "달랑거려?"

 "매달려 있길래! 매달려 있길래 한 번 살펴볼 수 있겠냐 물어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안 된다고 하더구만. 죽은 벗의 검이라고 사정하니 오만상을 찌푸리며 허락하데."

 그제야 조금 흥미가 생겼는지 엑셀리온이 손에 턱을 괴며 그래서, 하고 맞장구를 쳤다. 글로르핀델은 아차 싶었다. 이제 할 얘기 별로 안 남았는데.

 "어, 그러니까, 그냥 보고서 돌려줬거든? 그게 다야. 음...... 그리고 그 난쟁이왕은 오르크와 싸우다 죽었댔나, 그랬댔고. 오르크리스트는 딱히 뭘 많이 한 것 같지는 않더라고. 중간에 요정왕한테 빼앗겼다더라. 그게 다야."

 "인간의 왕은 언제쯤 등장해?"

 한 박자 늦게 알아들은 글로르핀델은 뭐 잘못 먹은 얼굴로 앓는소리를 냈다. 엑셀리온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 난쟁이왕 이야기나 더 해 봐. 어떤 인물이었어? 글로르핀델은 조금 어색하게, 스승 앞에서 배운 내용을 암송하는 학생처럼, 그러나 막힘없이 노래했다. 산아래의 왕, 돌 조각품의 왕, 은빛 샘의 군주께서 그의 왕궁으로 돌아오실 거라네!

 그가 기쁨에 젖어 흐르는 물줄기와 빛나며 타오르는 호수에 다다르자 친구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풀려 있었다. 그는 노래를 그치고 크게 친구를 불렀다.

 "엑셀리온."

 "한 번 만나봤으면 좋았겠다 싶네, 그 왕. 노래도 직접 들었었으면 좋았을 테고. 너른골 노래야? 호빗들이 부르던 걸 들은 것 같아. 같은 왕 이야기인 줄은 몰랐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친구는 여전히 멍한 눈빛이어서, 글로르핀델은 안절부절 못하다 발을 내리고 탁자 너머로 그의 손을 잡았다. 엑셀리온, 엑셀리온. 탁 초점이 돌아왔다.

 "가운데땅으로 돌아갔으면 해?"

 목메인 질문에 엑셀리온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영웅놀음 할 시대는 지났지. 됐어. 그래서? 용은 잡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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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hi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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