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킨/글 2019. 1. 5. 16:19

니르나이스 2n년 후



 늦은 아침, 엘렘마킬은 지독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 두 눈을 끔벅거렸다. 주변은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았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한 끝에 그는 제가 두 번째 관문의 숙소에 놓여 있는 모양이라고 결론내렸다. 숙소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은 태반이 돌의 관문의 제복을 입고 있던 것이었다.

 엘렘마킬은 머릿수를 거듭 어림해, 잠든 이들의 수가 다섯은 넘으며 스물은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후 도로 눈을 감았다. 그는 용케도 벽에 기대 앉아 있었지만 어쨌든 제 발로 일어서는 데는 가히 영웅적인 노력이 필요할 터였다.

 "괜찮아, 엘렘마킬?"

 그는 눈을 떴다. 깎아지른 벼랑 사이 관문으로 비치는 햇살은 희게 시렸고, 아란웨의 아들에게는 엄숙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미처 자각하기 전에 엘렘마킬은 손을 뻗어 보론웨의 얼굴에 어리는 빛을 가렸다. 그것만으로도 두통이 한결 가시는 듯했다. 아니면 그가 끝내 짓누르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보론웨가 푸스스 웃었다.

 "그래서, 경비대장님, 기분은 어때?"

 그러나 나는 네 목소리를 기억하지, 하고 생각하며 엘렘마킬은 영 딴소리를 뱉었다.

 "다시는 자네와 대작하나 봐라. 자네가 키르단의 친족인 걸 잊었지 뭐야."


 새하얀 침대보 위에 금발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엑셀리온은 문간에 기대 엷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다가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글로르핀델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잔뜩 구겨진 여름 이불을 아이처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웅크린 어깨가 숨소리에 맞추어 깊게 오르내렸고, 등에 달라붙은 셔츠로 뼈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글로르핀델을 흔들어 깨우려다 말고 머뭇거렸다. 셔츠의 흰 천이 흠뻑 젖어 있었다.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투명한 별빛을 굳히고 검날을 축성하는 손길로, 그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모았다. 무릎을 접어 올리며 붙어 앉자 침대 틀이 조용히 끼익거렸다. 결 고운 머리카락은 손가락으로 몇 번 빗어내리는 것으로도 쉽게 정돈되었고, 뺨 밑의 몇 가닥을 살며시 빼낼 때마저 글로르핀델은 뒤척이지 않았다. 언뜻 손끝에 스치는 맨살이 땀과 체온에 뜨끈했다.

 허리춤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그가 거의 다 땋아내리고서야 글로르핀델은 무언가 웅얼거렸다. 엑셀리온은 땋은머리에서 한 손을 떼어 친구의 날개뼈 가운데 가만히 얹었다. 조금 더 명확한 발음이 들려왔다. 아이카스텔.

 강인한 결의, 또는 혹독한 희망. 어느 틈엔가 글로르핀델은 돌아누워 그의 손을 마주잡았고, 한없이 어린, 물같은 얼굴은 우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황금꽃의 영주는 나직이 속삭였다.

 "꿈을 꾸었어."

 너를 죽였어, 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이드릴은 소리없이 몸을 일으켰다. 관도 신도 없이 춤추는 왕녀는 양탄자를 맨발로 딛으며 서너 걸음 나아가, 벽난로 옆에 걸려 있던 푸른 망토를 찾아 둘렀다. 잠옷 자락이 발목에 감겼다. 그녀는 침대를 지나, 요람을 지나, 서랍에서 눈처럼 흰 초 하나를 꺼내 들고는 문을 나섰다. 발꿈치에 와닿는 돌이 차가웠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흉벽에 양 팔꿈치를 짚고 선 뒷모습은 사랑스러운 것이었고, 부러 크게 타박거린 마지막 몇 발짝에 청년은 황급히 뒤를 돌아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곁에 다가섰다. 투오르는 그답잖은 흐릿한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그는 아마, 한 때 그들의 도시가 이 날을 얼마나 성대히 기념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이드릴은 제 입가에도 마찬가지로 뿌연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투오르의 가슴께에서는 이미 흰 초가 흰 돌 위로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타고 있었다. 이드릴은 제 초를 기울여 심지를 맞대고, 불꽃이 일렁이며 옮겨붙는 것을 지켜보았다. 투오르가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날은 다시 밝아올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수많은 예언과 예지를, 한밤에 날아드는 악몽같은 환영을 기억했고, 그 모두를 입에 담는 대신 엄지로 투오르의 손등을 쓸었다. 조금 더 활짝 웃었다.

 "그리고 놀도르의 승리는 위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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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hi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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